책들의 우주/문학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지하련 2023. 2. 3. 12:23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지음), 원용호(옮김), 민음사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은 바 있지만,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즉물적이고 무미건조하며 딱딱하고 폐쇄적이었다. 실은 한트케의 소설이 가진 작품성이 바로 이러한 즉물성이 될 것이다. 골키퍼는 수동적이며 반사적이다. 골키퍼는 먼저 움직이기 어렵다. 날아오는 공에 대해 반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매사에 반사적으로 움직인다면, ... 주인공 블로흐는 이런 인물이다. 그는 대화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만, 교감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수렁에 밀어 넣는다. 딱히 이유도 없다. 이러한 고립감, 단절감, 폐쇄적으로 향해 가는 자신 주변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없다. 그냥 보여주고 지금 현대가 이렇다고 말할 뿐이다. 그냥 블로흐같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냥 특이한 사람이지, 현대인의 표상도 아니다. 불안감은 현대 사회의 속성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블로흐 스스로의 불안감일 뿐, 현대의 그것이 아니다.  

 

뚜껑을 열어 놓은 작고 둥근 찻잔 안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을 때 찻잔 속의 차는 안쪽 벽에 반사되어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찻잔을 가지고 식탁에 앉아 있던 블로흐는 멍하니 찻잔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찻잎의 독특한 빛에 매혹되어 옆의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즐거워졌다. 마침내 그는 찻잔 뚜껑을 닫았고, 동시에 대화도 중단했다. (22쪽) 

 

스토리의 전개도 작위적이어서, 대화를 하면서 서로 교감하지도 못하는 블로흐와 같이 밤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블로흐가 그런 욕구에 지배당하는, 그런 인물로도 묘사되지도 않는다. 그냥 무미건조할 뿐이다.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그렇다고 생의 욕구를 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이 이렇게나 대단한 격찬을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단히 실험적인 소설이지만, 실험만 하는 소설은 싫다.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은 그야말로 사회적 콘텍스트를 만들어 그 속에서 적절한 인과성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개연성이 없는 스토리와는 다르다.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은 그 부조리함이 상당히 희극적으로 표현된다. 부조리함을 극대화하면서 보는 이, 읽는 이를 돌아보게 만든다. 심지어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 스스로가 그레고르 잠자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하지만 누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으면서 스스로가 블로흐가 된 듯한 기분에 빠질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블로흐는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곧 걷기 시작했다. 잠시 서있다가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멈춰서, 방향을 바꿔 일정한 걸음걸이로 달리다가,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또 돌리고, 멈췄다가, 이제는 뒤로 달리다가, 다시 뒤로 돌아, 앞으로 달리다가, 다시 또 뒤로 돌아, 뒤로 가다가, 다시 앞으로 달리는 자세를 하고, 몇 걸음 걷다가 빠른 달리기로 바꾸었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갓돌에 앉았다가, 갑자기 계속해서 달렸다. (93쪽)

 

그냥 나와 페터 한트케는 맞지 않는 것으로 해야겠다. 재미없는 독서였다. 어느 정도의 작품성을 가지고 있을 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찬사를 받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번역본이라서 그럴 지도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