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하련 2023. 2. 5. 13:33

 

 

환희의 인간 L’homme joie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지음), 이주현(옮김), 1984북스

 

 

(…)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168쪽)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어쩌면 이 문장만으로 몇몇은 이 책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도록 시적이며 감미롭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어지는 이 책은 잃어버린 자연과 신비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노래한다.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테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처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약돌, 갓난 아이의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지요. (17쪽)

 

몇몇 단어, 몇몇 표현, 몇 개의 문장들은 참 아름다웠다. 플라타너스는 하얀 별로 인도한다. 여기에서 저기로, 이 단어에서 저 단어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어지며 우리는 어떤 신비를 읽어낸다. 그러면서 서로를 알게 되며, 미처 몰랐던 나를 알아간다. 

 

호텔로 되돌아가는 길. 몽펠리에의 플라타너스가 하얀 별이 지글거리는 은하수까지 내 머리를 들어 올린다. (40쪽) 

 

짧은 글들로 구성된 이 에세이집은 보뱅이 어떤 작가인지, 시인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다. (38쪽)

 

도리어 나는 너무 늦게 보뱅을 알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나 추천해도, 누구나 좋아할 좋은 작가다. 요즘같이 바쁘고 정신없을 때, 잠시 틈이 난 사무실 구석 자리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멍하게 앉은 카페 의자에서 읽어도 될 책이다. 그리고 책을 펼쳐 읽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될 것이니.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 속에 머물며, 침묵할 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 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54쪽) 

 

 

"La plus noble façon de disparaître est la lecture. C’est aussi l’acte d’amour parfait : une âme touche une âme, directement." - Christian Bobin

(사라지는 가장 고귀한 형식은 바로 독서입니다.  그것 또한 가장 완전한 사랑의 행위예요. 직접, 영혼이 영혼을 만지는.)

그는 작년 11월 말에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