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우리의 사이와 차이, 얀 그루에

지하련 2023. 2. 18. 11:58

 

우리의 사이와 차이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옮김), 아르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두 명을 떠올렸다. 한 명은 알렉상드르 졸리앙, 나머지 한 명은 루이 알튀세르.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졌으나, 장애와 함께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열정과 희망에 이야기하는 알렉상드르 졸리앙. 그의 책들은 명상적이며 소박하며 초월적이다. 현대적이지 않고 도리어 중세적 열정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루이 알튀세르는 사랑하는 아내 엘렌를 목 졸라 죽인다. 평생 우울증과 싸웠으나, 20세기 후반 최고의 마르크스 이론가였다고 하면 이상할까. 어쩌면 그가 새롭게 해석한(혹은 이종교배한) 마르크스 이론으로 인해 강렬했던 마르크스주의가 퇴색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죽인(살해한) 끔찍한 사건 속에서 자신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부한, 너무 처절해서 읽기 마저 고통스러운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을 출간했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은 3년 정도 한국에 머물며 공부하다가 다시 스위스로 갔다. 한국에 머물며 몇 권의 책을 냈다. 가끔 일간지에 칼럼을 싣기로 했는데, 좋았다. 알튀세르는 지금 얼마나 읽힐까.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관련 이론을 전공하는 이들도 드물어지고 읽는 이들도 드물어지는 요즘, 알튀세르는 일종의 죽은 이름 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나에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이다. 

 

얀 그루에(Jan Grue)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 장애와 함께 살아왔고 그 장애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분투하며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낙인이 찍힌 개인은 자신에게 닫혀있는 사회의 문을 열어보기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쏟음으로써 자신이 속한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개선해 보려 한다. - 어빙 고프먼 (118쪽)

 

고프먼은 낙인을 손상된 정체성, 즉 스티그마라고 했다. 변색되거나 파괴된 정체성, 손상되거나 썩어 버린 정체성, 그 손상은 감염된 상처와 같아서 다른 부위로 번지며 부패와 부식을 초래한다. (119쪽) 

 

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병원의 진단 기록과 자신의 기억, 현재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대단히 고통스럽다거나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조금은 건조하게, 살짝 딱딱하게, 그러면서 분석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원래 지금의 나이까진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도 살아있으니까. 책 중간에 최초의 진단이 잘못된 검사임을 드러났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몸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며 냉소적으로 말한다.

 

기록은 기억과는 달리 안정적이다. 초기 기록문화에서 엿볼 수 있는 금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가장 희미한 잉크라 할지라도 강렬한 기억을 능가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인간의 습관 중 가장 좋은 것이라 했다. (45쪽)

 

기록을 인용하지만, 기록일 뿐, 자신의 삶을, 고통을, 인내를 대변해주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 가능한 유일한 방식인 문자는 권위적이고 이념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데올로기, 즉 이념의 기능은 사회적 현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불변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 테리 이글턴 (103쪽)

 

스스로를 임상의 대상으로 드러내며 자신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때론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 대부분 그런 건 아닐까.

 

자아는 주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 어빙 고프먼(126쪽)

 

몸에 장애가 없으면, 가정 환경이 불우하거나, 무슨 이유인지도 모른채 왕따를 당하거나, 타인의 실수로 교통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거나, ... ...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 입으며 맨살로 이 세상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푸코는 임상적 시선이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종속되는 주체를 만들어 내며, 시선을 받는 이들, 즉 종속된 주체는 도덕적 부담과 명령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주체는 항상 자기 자신에 관해 설명한다. 그는 행위의 주체로서 그 행위가 자기 자신의 결정 하에 이루어진다고 배운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이 속한 상황 속에서 오롯이 홀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 결정권이 없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 결과로 죄책감은 내면화되어 이것은 결국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74쪽)

 

시선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시선의 주체, 즉 권력 행사자의 한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진다. 이러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권력 관계를 자신에게 주입함으로써 스스로 종속의 원칙이 된다. - 미셸 푸코(75쪽)

 

어빙 고프먼의 말처럼 주어지는 것이며 받아들여야 하고, 그 이후로는 얀 그루에처럼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다른 이의 언어로 기록해 보려 한다. 나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의 시선으로 기록해 보려 한다. (155쪽)

 

 

읽을 만한 사람들은 다 읽은 책으로 보인다. 그만큼 많은 찬사를 받은 책이기도 하다.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추천한다. 

 

 

Jan Grue와 그의 부인 Ida Jack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