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음악

Arvo Part, The Collection

지하련 2023. 3. 12. 18:07

 

Arvo Part, The Collection, Brilliant Classics  

 

 

“나의 칼레비포에그(Kalevipoeg)*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아르보 페르트

 

 

습관적으로 음반을 올리고 플레이 버튼를 누른다. 사각의 방은 어느 새 단조로운 음들로 가득차고, 마음은 가라앉고 대기는 숨을 죽이며 공기들의 작은 움직임까지 건조한 피부로 느껴진다. 이 때 아르보 페르트가 바라던 어떤 영성이 내려앉는다. 적대적인 느낌을 풍기며 나를 옥죄던 저 세상이 어느 새 감사한 곳으로 변하며 한 때 나를 힘들게 했던 아픔들마저도 나를 끝끝내 성장시킨 어떤 고비였음을 떠올리게 한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는, 20세기 후반 이후 최고의 작곡가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21세기 초반, 정확히 2011년부터 2018년 사이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1932~ ) 다음으로 가장 많이 연주된 작곡가이기도 하다. 존 윌리엄스의, 연주된 음악들 중 상당수가 영화음악이었을 것을 감안한다면(스타워즈 영화 음악의 그 작곡가다. 그냥 영화 음악가라기 보다는 클래식음악 영역에서도 높은 인정을 받는 작곡가이다), 클래식 음악 영역만으로는 아르보 페르트는 많이 연주된 현대 음악 작곡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ECM에서 출시된 <<타블라 라사(Tabula Rasa)>>를 듣고, 순식간에 그의 음악 세계에 빠져 들었다. 본능적으로 종교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서양 중세와 고전 미술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시절이었으니, 적어도 종교적인 색채만은 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대표적인 현대 음악가이면서 동시에 현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중세풍의, 교회음악들을 작곡하는 작곡가이다. 그의 초기 음악들은 쇤베르크의 12음계를 기반으로 다양한 근대 작곡가들의 영향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이 시기 마지막 대표작은 <<크레도Credo>>(1968)이다(12음계 뿐만 아니라 이 음악에서는 다양한 실험들, 마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느낌으로). 하지만 이 작품은 당시 너무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소련의 반발을 샀고(그 당시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지배 하에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그의 음악들은 사라졌으며 아르보 페르트 스스로도 열정과 의지를 잃어버린 듯했다. 그 이후 약 8년 간 그레고리안 성가 등 중세음악, 르네상스 초기의 다성음악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우리가 요즘 듣고 있는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들 대부분은 이 이후의 작품들이다. 특히 아르보 페르트의 “tintinnabuli style”은 3화음(Triads)의 소리가 마치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슈피겔 임 슈피겔(Spiegel im Spiegel)>>이 틴틴나블리 스타일로 작곡된 대표적인 곡이다.

 

그의 음악들 대부분은 미니멀리즘 속에 중세스러운 찬란함을 숨겨놓고 있다. 하나의 음이 다른 음으로 이어지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흘려가며 마음의 어두운 부분에 밝은 햇살을 밀어 넣는다. 종교적 영성이 가득찬 그의 음악들은 현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반대로 그만큼 현대의 문물들은 영성적인 것을 뒤로 밀어내고 있어, 거기에 대한 반발 같은 건 아닐까. 

 

<<The Collections>>라는 박스 세트는 9장의 시디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저기 레이블에 나온 음반들을 모아 출시하였다. 각각 시디마다 최초 연주 일시, 연주자, 최초 레이블 등이 표시되어 있다. 연주들에 대해 평가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듣기에 좋았다. 박스 세트가 가진 경제적인 가격, 그리고 Arvo Part의 대표작들을 한 번에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한 음반이라 소개해본다. 

 

Arvo Part

 


* 칼레비포에그: 프리드리히 라인홀트 크로이츠발트(Friedrich Reinhold Kreutzwald, 1803 ~ 1882)가 쓴 서사시이며, 에스토니아 국민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이 서사시를 쓴 크로이츠발트는 에스토니아 문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다. 에스토니아 민담에 나오는 칼레비포에그라는 거인 영웅 이야기를 서사시로 만든 것으로 에스토니아 각지에 내려오던 민담을 모아 쓴 작품이라 알려져 있다.

* 위 글은 위키피디아, 브리테니커 등에 실린 아르보 페르트 항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