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빈곤과정, 조문영

지하련 2023. 5. 31. 13:26

 

 

빈곤과정 Poverty as Process

조문영(지음), 글항아리 

 

 

조박사님, 그만두십시오. 아니 중국 공민도 아니고 외국인이 와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여기 정부 쪽 사람들 반감 가질 게 뻔합니다. 한국 사람들 조선족 마을 와서 이것저것 대꾸하면 우리야 기분 나빠도 같은 동포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조 박사님은 이 중국인들한테 완전 외국인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법을 모르든 어떻든 그거야 그들 사정이죠. 아니 자기들 친척 다 있고 한데 어딜 괜히 나선답니까. 저 같은 중국인 기자도 이런 일에 관여하면 십중팔구 이기지 못하는 게 뻔한데 아니 외국서 온 사람 얘기를 도대체 누가 들어준답디까 … … 물론 도우려는 맘은 알겠지만 이쯤에서 그만두십시오. (175쪽)

 

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책들을 읽으면서 왜 한국사회학자들은 민족지학(民族誌學)적, 문화기술지(文化記述誌 ethnography) 또는 민속지학(民俗誌學)적 연구를 수행하지 않는 것일까, 또는 그런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런 사회학책은 없을까 의구심을 가진 바 있었다. 사회학 뿐만 아니라 인류학에서도 이러한 연구방법론이 널리 활용되고 있지만, 그러한 연구에 기반을 둔 책을 거의 보지 못한 탓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문영 교수의 이 책을 읽었다. 문화기술지적 접근이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 나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연구 방법이었다. 위 인용문처럼 관찰(연구)대상이 되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인류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하여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연구인데, 그 전에 나는 감정적 동화를 먼저 연구나 분석은 뒤로 밀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용케 그러한 연구를 수행했다. 책을 읽으면서 연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라며 감탄하였다. 

 

빨리 읽겠다는 조바심으로 출퇴근 지하철에서 틈틈이 읽기 시작하여 비오는 주말에 완독을 했다. 지하철에서는 워낙 띄엄띄엄 읽었던 탓에 집중해 읽지 못했는데, 주말 오전 시간에 집중해 읽으니, 나도 모르게 웃다 울다 하였다. 초반부에는 한국, 중국 몇 명의 사람들이 나오고 후반부에는 대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하나 공감이 가며, 대부분 내가 알지 못했거나 관심 밖의 내용들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가치있는 독서를 제공하였다. 책 초반의, 빈곤 과정을 연구하기 위한 문화기술지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아마 대상 선정이 한국보다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였을 때 부딪히는 여러 과정들이 눈에 그려 지기도 했다. 이 책은 ‘과정으로서의 빈곤’에 대한 실제 현장에 기반한 본격 연구서이다. 하지만 폭넓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읽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 

 

빈곤은 어디에나 있다. (…) 지구 상의 모든 생명은 빈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우선 나와 내 가족의 삶에 달라붙을 수 있다. 배고픈 삶, 전망 없는 삶에서 나오는 공포, 분노, 무력감이 자기 비하로, 피붙이에 대한 폭력으로 치닫는다. 쪽방촌, 고시원, 다세대주택, 임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지척의 가난을 보고, 듣고, 냄새맡는다. (4쪽)

 

책은 빈곤을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책 초반에는 한국 사회에서의 빈곤이 변해온 과정,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 어떻게 정부 정책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서 서술하고, 뒤이어 중국 사회에서의 빈곤에 대해 문화기술지적 방법으로 서술된다. 한국 사회의 빈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자발적인 활동가들에 의해 조직되고 실천되었던 빈곤에 대한 대응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민주화가 되면서 빈곤에 대한 대응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어떻게 관료-기계화되었으며, 이것이 어떤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는가도 언급된다.

 

‘인우보증서’의 효력도 사라졌다. 인우보증서란 실질적으로 생계보호가 필요한데 법에 저축되는 사유가 있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구에 대해 이웃이 자기 이름으로 보증을 해주는 것으로, 생활보호법 시절에는 동사무소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47쪽)

 

예전에는 빈곤 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가들과 공동체 주민들이 주축이 된 자발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이러한 공동체가 이제는 정부나 유관 기관들의 지원을 받는 자활센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변했다. 일견 복지 국가로 진일보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제는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가끔 민간이 해야 할 일과 정부가 해야 할 일의 경계는 어디인가 생각해보게 되는데(특히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복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함께 지원 대상이 되는 가정, 또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의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 자리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전략으로 작동해왔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 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으로 호소하기도 한다. (67쪽)

 

이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여러 책들을 통해서도 언급되었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자립 의지마저 꺾어 놓는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역학자 케이트 피켓 Kate Pickett과 리처드 월킨슨Richard G. Wilkinson은 경제적 약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신병, 미성년 임신, 마약, 폭력 등을 연구하다가 역학이 아닌 경제학적 문제에 부딪혔고 이를 정리해 <<평등이 답이다 The Spirit Level: Why Greater Equality Makes Societies Stronger>>라는 책으로 출간해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그 전에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많은 책들이 있었으나, 이 책만큼 충격적이지 않았으며, 그 이후 경제적 불평등(특히 선진국 사회에서의)은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언급하는 이유는 ‘자립’이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한 번 경제적 약자가 된 이후 이를 극복하여 자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실제적인 통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빈곤에 대한 대응, 혹은 극복도 말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자활’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에서 어떤 해답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중국 폭스콘 노동자와의 만남과 인터뷰를 통해 독자는 현대 중국의 청춘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폭스콘 공장의 비윤리성에 대해서 알게 되며, 폭스콘이 젊은 중국인들의 미래를 어떻게 앗아가는지도 알게 된다(나는 한국 사람들이 미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 그리고 미국 기업들이, 특히 제 3세계에 대해 가지는 비도덕성, 비윤리적 태도, 고압적이며 거만한 세계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또한 한국 또한 그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폭스콘 공장의 분업시스템은 노동자에게 부분적, 반복적인 작업만 강요하면서 일찍이 마르크스가 강조한 노동 소외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반면, 디지털 작업은 참여자가 공익활동 현장과 소셜미디어 현장을 가로지르며 게시물을 읽고, 작성하고, 업로드하고, 다운로드받고, 관리하고, 채팅에 참여하는 일련의 과정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생산’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제공했다. (117쪽)

 

위 문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과연 요즘 기준으로 노동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왜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만을 노동이라고 부르는가. 더 나아가 그러한 노동의 가치는 무엇인가. 노동이라고 할 때, 무조건 육체적인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지식을 활용하는 일은 노동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공장이나 기업에 속해서 하는 일만 노동인가. 가령 가사 노동은? 봉사 활동은? 실업 급여를 신청하는 일은 노동이 아닐까.

 

이 모든 일이 노동과 무관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임금노동을 상식의 준거로 삼고, 경제 가치를 생산함으로써만 생계를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식은 오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1970년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 운동을 전개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 페미니즘의 공로가 크다. (103쪽)

 

전 지구적 노동분업 체제에서 어떤 종류의 비교 우위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농민’, ‘노동자’ 같은 익숙한 범주에 더 이상 편입되지 않은 채, “분배의 결과물을 찾아내고 확보하려는 끊임없는 과정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퍼거슨은 이러한 생존 전략을 ‘분배노동’으로 명명하면서 노동 개념과 생산 과정 사이의 교조적 연결을 해체할 것을 제안한다. 구걸이나 절도도, 친척한테 도움을 청하거나 정부에 수당을 신청하는 일도 모두 분배 노동이 될 수 있다. 수급 절차를 밟아가던 다니엘이 모멸감을 견디기 힘들어했듯, 어떤 분배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를 획득하는 일엔 상당한 인내와 감정적 노고가 따른다. 빈자에게는 특히 더 고된 노동이다. (104쪽 ~105쪽)

 

이 책의 장점은 시선이 빈곤에만 머물지 않고 빈곤을 둘러싼 여러 지점들을 이야기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최근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시야를 확장시킨다. 빈곤한 사람이나 가정이 그들을 옥죄고 있는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관찰하며, 그러한 노력이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가를 보여준다.

 

아마티아 센이 빈곤을 단순히 낮은 수준의 소득이 아닌 “기본적 역량capability”의 박탈로 정의한 이유다. (185쪽)

 

아마티아 센의 기여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증적으로 증명했다는 데에 있다. 교육을 받고 정보를 습득하며 움직일 수 있는 역량,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역량을 누군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이 역량을 지원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관찰되는 이들 대부분은 이런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술 한 잔 들어가면 “도시 사람들은 국가에서 연금 받지만 나는 자식이 연금”이라며 호기롭게 말했지만, 막상 술이 깨면 자식한테 미안할 이유가 수십가지였다.(162쪽)

 

하지만 안정적인 거주지의 확보나 생활의 보전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자식이 연금이라고 말하지만, 자식이 연금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구차함을 어찌 모를까.

 

인류학자들은 집home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151쪽)

 

빈자들이 차별과 경멸의 시선을 끊어내는 대신 감수하는 풍경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은유가 특성화고 출신 현장실습생 청소년들의 죽음을 살피다 발견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문제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185쪽)

 

우리는 종종 해결방안을 찾지 않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느냐고 다그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역량의 하나라면? 그것을 경험해본 바, 배우지도 못했다면? 그렇게 살아왔다면?

 

하지만 쑨위펀이 자리를 만드는 과정은 (심지어 자기 자신한테조차) 자격을 의심받고, 자격없음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186쪽)

 

결국 빈곤의 수렁에 빠진 채 자신의 잘못으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탄하게 된다. 실제는 그렇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비만이 모구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 책은 빈곤을 넘어서 우리의 현재를 되짚어본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빈곤에만 머물지 않고 빈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문제화하며 독자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든다.

 

한국 청년들의 글로벌 이동에 관한 문화기술지 작업은 불안, 우울, 무기력, 탈진, 도피, 탈주, 유예의 서사로 빼곡하다. (193쪽)

 

빈곤의 문제는 빈곤을 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면서 빈곤을 넘어 현재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서술하며, 한국국제협력단(KOICA)나 여러 기업체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봉사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는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뒤에 숨겨진 어두운 면에 주목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원조나 도움이 일종의 일자리가 되고 도리어 빈곤을 둘러싼 산업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원조가 곧 돈벌이가 되는 상황은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보듯 발전국가 시기 한국에서도 빈번했고, 해외 원조 자원을 통해 구축된 빈곤산업은 실업이 오히려 ‘정상’ 상태가 된 글로벌 남반구 청년들에게 귀중한 일자리를 제공해왔다. (225쪽)

 

이 책은 직접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희망을 찾기 위한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딱히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희망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희망을 찾고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 논의를 이어나간다. 

 

앙드레 고르가 1980년대 유럽의 자동화와 정보화 물결에서 봤던 가능성, 즉 “노동할 수 없는 채 살아가야 하는 상황” 사이에 족쇄를 걷어내고 자율 결정과 관계적 상호성에 토대를 둔 사회를 만들 가능성이 디지털 경제어서 기본 소득까지 다양한 공론장을 열어젖히기도 했다. (318쪽)

 

책 후반부에는 빈곤을 넘어서 안정적인 생활 영위를 위한 기본 소득에 대한 언급이나 노동에 대한 재정의, 또한 연구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말하며, 이 연구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를 검토한다. 

 

“노동력 상품으로 인정받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쏟아붓는 과정에서 ‘노력’은 윤리와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고, “노력하지 않는 자에 대한 비난은 마치 인간성에 대한 심문처럼” 되어버렸다. (332쪽) 


하지만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 사이의 비대칭성과 전자의 인식론적 우위를 당연한 전제가 아닌 쟁론과 성찰의 대상으로 붙들어온 인류학자라면, 이런 시소에서 빠져나와 100년 전 말리노프스키가 언급한 “실제 생활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것들 the imponderabilia of actual life”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375쪽)

 

후반부는 다소 전문서적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하나하나 관점의 전환을 요청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개념이 변했거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빈곤 연구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메리 더글러스는 “오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체계가 존재한다”면서 ‘오물dirt’ 개념의 상대성을 강조했다. 예컨대 신발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게 아니라 식탁 위에 올려졌을 때 더럽다. 이 같은 상대성은 오물에 관한 관심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오물로 만드는 질서에 대한 질문임을 시사한다. 분류를 흐리게 하거나, 얼룩을 남기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어떤 사람, 사물, 사건, 해동이든 불순하다고 여겨진다. (272쪽)

 

그리고 하나하나 되돌아보고 바꾸기 위한 작은 활동들을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에 참여한 실제 대학생의 의견을 인용하기도 한다. 

 

메리필드가 강조했듯, “지속하는 마주침이 일어나면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동일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생성의 과정 속으로, 뭔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 속으로 쏘아 보낸다.” (353쪽)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존재가 젊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정당화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예언케 했고 그 출현을 필연적인 사실로 정립시켰다. 철학이 우위를 점했다. -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사회주의를 넘어서>> 중에서 (372쪽)

 

라푸르와 슐츠는 “위기가 있는 곳에 돌파구도 있다”라는 문장이야말로 악마적이라고 주장한다. “다가오는 파국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특히 위기는 그러지 못한다. 성공은 전적으로 우연한 기회를 포착하는 우리의 역량에 달려있을 것이다.” (387쪽)

 

결국 우리 모두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내가 주로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읽으며 비판의 기술을 익혔다면, 현재 내가 만나는 (특히 여성) 학생들은 대부분 사회문제에 눈뜬 계기로 페미니즘 공부를 언급했다. "여성주의를 대학 와서 정말 처음 들었거든요. 그때 권력이란 걸 처음 생각해봤고," "고등학교 때 많이 화가 나 있었어요. 권위적인 선생님들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 나중에 대학 와서 페미니즘 만나면서 ... 아 이런 문제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구나 해방감을 느꼈어요." (337쪽)

 

이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동안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앞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지 알아야 한다. 책 후반에 저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과의 여러 활동들을 보여주며 요즘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나 또한 그 부분을 읽으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험악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핑계로 우리 사회는, 기성 세대는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생명은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며 인간다운 삶 그 자체다. 사회적 억압 속에 놓여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같이 살자’고 절규한다.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 인간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땅과 물, 공기가 ‘같이 살자’고 절규한다. 사회적 죽음, 생태적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삶의 열망이며 지속가능하게 살아가려는 의지다.” - 최종덕(<한국주민운동 50년 성찰과 주민운동 방향>(<<한국주민운동 50주년 기념 행사 백서>>, 한국주민운동교육원) 중에서 (395쪽)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가치 있는 일인데, 우리는 종종 이것을 잊는다. 좋은 책을 읽었다. 이런 연구자가 있다는 건 한국 사회에 축복이다.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고 그렇게 변하는 건 누군가 소리없이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를 결국 기득권이 누리게 될지언정 실천해 나가야 한다. 

 

아마 올해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기회 닿는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조문영 교수 (출처: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