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하련 2024. 8. 11. 17:42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지음), 문학동네 

 

 

나이가 들고 보니, 내가 했거나 겪었던 많은 일들이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매우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것들임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이 사회가 더 나아진 것인지 알 턱 없지만 말이다. 그 땐 몰랐다가 지금 알게 되었으니, 더 나아진 것일까. 도리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예전보다 좋아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좋고 바람직한 변화가 있다면 그렇지 못한 변화가 있고, 그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들로 인해 세상은 더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이 소설은 뭐랄까, 상당히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우리 세대들이 공유하는 경험들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지만, 언제나 중간에 그만두거나 포기하게 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무시되던, 폭력적 일상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중학교 때 단단한 나무 막대를 가지고 다니던 그 선생은 말을 듣지 않는 학생의 머리를 그 나무 막대로 때리다가 머리에 구멍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구급차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고 며칠 후 아이는 피가 난 자리를 꿰매고 웃으면서 학교에 왔다. 그런데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대든 아이들은 없었다. 선생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생기면 난리가 날 것이다. 나는 이런 변화가 신기하고 낯설다. 불과 삼사십년 전 일인데. 어디 지방의 낙후된 학교라고 여기지 마라. 육십 여명 정도 되는 한 반의 절반 이상 아이들이 200점이 만점인 고입 연합고사에서 180점 이상 받고 인근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중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려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7쪽)

 

소설의 시작이다. 

 

그대는 앨리시어가 걸을 때 정장을 단단하게 차려입은 굵은 골격이 괴상한 방향으로 솟구쳤다.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앨리시어가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채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8쪽) 

 

그리고 소설의 주제이자, 결론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진다. 병신들과 씨발됨으로 채워진 이 소설은 끝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끝나자마자 곧장 우리를 향한다. 병신과 씨발됨으로 어우러진, 익명 뒤에 숨어있는 우리들을. 이미 엘리시어의 채취를 소유하고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이유없이 불쾌하다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걸 무시하며 주변의 앨리시어들을 피하고 경멸하는 우리들을 향한다. 왜냐면 앨리시어는 바로 너이고 나이며 우리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소설이다. 마치 악몽처럼 사건들이 스치고 고통스러운 풍경이 펼쳐지지만, 그것을 악몽이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고통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병신이 아니라고, 병신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살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절대 고모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앨리시어. 실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회가 안정된다는 건, 문제가 고착화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늘 저기 저렇게 있었던 문제이므로, 그건 이제 문제가 아니다.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건 앨리시어다.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는 폭력의 일상 속에서 간신히 남은 채 여장부랑자가 된 앨리시어다. 그 때의 고모리는 없다. 그 때 그 사람들도 없다. 이제 아무도 모른다. 잊혀진 기억을 들추지 않는다. 이미 우리들의 체취가 되었으니, 앨리시어는 문제가 아니다. 앨리시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또다른 앨리시어들인 우리는 저 앨리시어를 모른 척 피해가면 될 뿐이다.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들의 병신됨은 앞으로 이어질 것이다.

 

특히 '병신'이라는 말을 대신할 다른 말을 고민했으나 그대로 두었다. 앨리시어 형제의 대화에서 그 말을 뺄 수가 없었다. 앨리시어 형제에게 한줌이라도 야만이 있다면 그건 나를 포함한 어른들의 야만에서 왔을 테니 그 기록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2023년 10월, 황정은) 

 

*               *  

 

놀라운 소설이다. 절망적인 현실 인식이지만,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럽겠지만, 나는 황정은을 지지한다. 절망 속에서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