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여 집에 오니, 서재에 로봇청소기가 전사해 있었다. 출근하면서 방문을 살짝 닫아두고 블라인드를 내려 햇살이 들어오지 않게 한다. 방문을 열어두었다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집을 한 바퀴 돌아다니는 로봇청소기가 들어와 바닥에 스파이크로 세워둔 스피커를 쓰러뜨리고 결국엔 바닥에 이리저리 있는 전선들을 돌돌 말아 먹고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분명 방문을 닫아두고 출근했다고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로봇청소기가 들어갈 수 있겠다 여겼던지, 이젠 집 구조에 익숙해져 용감해진 것인지... 회사에서의 스트레스와 퇴근길 더위로 땀 덤벅범이 된 나는 폭발하고 만다. 혼자 화를 내면서 로봇청소기가 먹은 전선들을 하나하나 돌려가며 꺼내고 쓰러진 스피커를 바로 세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레코드판과 스탠드등을 제대로 해놓는다. 사는 게 쉽지 않다.
오늘은 업무 때문에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일을 했다. 어느 순간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 된 탓에, 젊은 시절 타인들에게 민폐를 너무 많이 끼친 탓에 이젠 그러지 않기로 하지만, 역시 체력엔 한계가 있다. 새벽에 일을 하다가 문득 풀하우스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소설가 유미리가 후쿠시마 근처에 연 작은 책방이다. 운영한 지도 꽤 되었다. 그냥 시간이 되면 한 번 가고 싶은 곳이다. 홈페이지에 가니, 유미리의 <<8월의 저편 The End of August>> 영역본 페이퍼백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나온 소설인가 싶어 찾아보니, 2002년에 나온 소설이고 2004년에 김난주의 번역으로 한국에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절판이다. 아마 다시 나올 것같지 않다. 영역자인 Morgan Giles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8월의 저편>> 플레이리스트를 올려놓았다고 풀하우스에 알려주었다. 흥미로운 리스트였다. 유미리에게 한국은 지금 현재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이거나 전쟁 전후의 한국일 것이다. 마치 내가 우스개소리로 내 경상도 사투리는 3~40년 전 사투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Morgan Giles가 올린 플레이리스트를 보니, 싱숭생숭해진다.
https://allwrongsreversed.net/2024/06/13/the-end-of-august-playlist/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만나고 조우하며 헤어진다. 서로 상처를 입히고 입고 아파하다가 위로하며 사랑한다는 이유로 헤어진다. 더이상 상처 입고 입히기 싫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그 과거로 인해 현재까지 엮이고 싶지 않은 탓이다. 오래 전 음악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가 유미리가 건강할 때 풀하우스에서 그녀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냥 그러고 싶다. 아직 그녀의 팬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소설을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참, <<풀하우스>>는 유미리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가 유미리가 후쿠시마에 서점을 열게 된 이유를 아래 글에서 간단하게 소개했으니, 참고하시길.
https://intempus.tistory.com/2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