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위대한 사상들, 윌 듀란트

지하련 2024. 9. 4. 22:41

 

위대한 사상들

윌 듀란트(지음), 김승욱(옮김), 민음사 

 

 

바로 뻔뻔한 영웅 숭배. 모든 것을 평준화하고 아무것도 우러러보지 않는 시대에 나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인 토머스 칼라일과 같은 자리에 서서, 플라톤의 그림 앞에 선 조반니 미란돌라(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자)처럼 위인들의 신전에서 촛불을 켠다. (17쪽) 

 

이 문장을 읽으며 웃었다. 뻔뻔하긴 하다. 보통선거의 시대. 모든 이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시대. 아무리 불평등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과거 어느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평준화되고 아무것도 우러러보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그래서 영웅이 사라지는 시대인가. 아니면 그 영웅의 자리에 팝 가수나 배우들이 자리잡은 시대인가. 

 

이런 역사관에 누구보다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카를 마르크스다. 이 역사관은 예외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불신하고, 우월한 재능을 시기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이 세상의 상속자로 떠받드는 시각과 연결되었다. 결국 사람들이 역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19쪽) 

 

이 점에서 윌 듀란트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뻔뻔하게 영웅을 숭배하겠다고. 그리고 이 책은 영웅들을 숭배하는 책이다. 그리고 나도 그 영웅들을 숭배한다. 이 점에서 나는 확실히 보수적이다.(*) 이어지는 아래 문장을 보라. 민중의 역사 따윈 안중에도 없다.(**)  

 

인류의 진짜 역사는 물가나 임금 속에도, 선거와 투쟁 속에도 있지 않다.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의 대의 속에도 없다. 진짜 역사는 인류 문명과 문화의 총합에 천재들이 기여한 영원한 업적 속에 있다. 이런 말을 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프랑스의 역사는 프랑스 인민의 역사가 아니다. 땅을 갈고, 신발을 수리하고, 천을 재단하고, 행상을 하던 무명의 남녀가 일군 역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항상 이런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20쪽) 

 

이 정도 되면, 이 책이 어떤 유형의 책인지 짐작하게 될 것이다. 윌 듀란트은 자신이 숭배하는 사상가와 시인들을 되새기며 놀라움과 찬사를 바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하며 놀라워하며 읽었다. 

 

우리는 왜 플라톤을 사랑하는가? 플라톤 자신이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동료들을 사랑하고, 변증법의 향연에 취하는 것을 사랑하고, 생각과 사물 뒤에서 쉽게 잡히지 않는 실재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지닌 무한한 에너지, 거침없이 떠돌아다니던 상상력, 모험적이고 복잡하며 구원받지 못한 삶속에서 그가 찾아낸 기쁨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지상에 있는 동안 매 순간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33쪽) 

 

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 모두는 플라톤주의자들이다. 현대의 과학자들, 특히 이론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 모두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서양 사상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늘 우리를 감동시키는 거의 유일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 벅찬 감동 속에서 학문은 시작된다. 

 

코페르니쿠스가 얼마나 심오한 사상가였는지는 그의 연구가 미친,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현대가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세속주의가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이성이 멀고 먼 옛날부터 옥좌를 차지했던 신앙에 맞서 혁명을 일으켰으며, 인류는 부서진 궁전처럼 변해 버린 그의 꿈을 생각으로 재건하는 오랜 작업을 시작했다. 천국은 그냥 하늘, 우주, 무(無)가 되거나, 지상으로 내려와 한때 낙원을 바랐던 사람들의 굶주린 마음 속에서 유토피아의 꿈을 길러 냈다. 인간들을 돌보던 신들이 인간이 성년에 도달하자 스스로 지성을 활용해 살아가도록 놓아두고 사라져 버렸다는, 플라톤이 들려준 우화와 비슷했다. (45쪽)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녹아내리는 구름들 속의 작은 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윈은 인간을 이 세상의 덧없는 지배권을 놓고 싸우는 동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투쟁의 아들이었으며,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은 세상 누구보다 사나운 금수들조차 자신의 잔인성은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다며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 인류는 이제 자애로운 신이 총애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원숭이의 한 종류였다. 변이와 선택 과정에서 운이 좋아 불안정하지만 위엄있어 보이는 자리까지 올라왔으나, 언젠가 때가 되면 다른 생물에게 추월당해 사라질 운명이었다. 인간은 불명의 존재가 아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 예정된 생물이었다.(58쪽) 

 

월 듀란트는 자신의 숭배를 거침없이 표현한다. 단호하다. 그리고 명징한 단어로 한 사상가를, 한 시인을 서술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소포클레스처럼 고전적인 차분함과 객관성을 지니지 못했고, 아이스킬로스처럼 엄격함과 숭고함을 지니지도 못했다. 에우리피데스와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감정적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흠 잡을 데 없는 투르게네프, 그리고 거인 톨스톨이 사이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우리의 비밀스러운 마음이 드러나고, 우리의 비밀스러운 갈망이 이해를 얻는 곳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다. 올림포스 이야기에 싫증이 난 그리스 연극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일들을 노골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통해서 였다. (81쪽) 

 

짧지만 강렬했다. 특히 책 후반부의 시인에 대한 설명은 놀라웠다. 결국 나는 존 키츠를 읽기로 했다. 존 키츠가 쓴 몇 편의 시를 영어로 읽긴 했으나, 제대로 읽지 않았다. 올해 남은 기간 동안 키츠를 읽어야 겠다. 틈틈히 번역해 블로그에도 올려야겠다. 

 

삶이 고달프거나 우정이 멀어지거나 혹시 우리 아이들이 자기만의 세계와 집을 꾸리기 위해 우리를 두고 떠나 버릴 때,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들고 탁자에 앉을 것이다. 라블레와 함께 세상을 비웃고, 존 키츠와 함께 가을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친구들, 결코 대답해 주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한동안 걸으면서 그들의 말에 겸허히 귀 기울이고 나면 우리의 병이 치유되고, 우리는 이해에서 나오는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146쪽) 

 

이해에서 나오는 평화. 어쩌면 그 평화는 신이 우리에게 선사한 평화만큼 값진 것이리라.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만, 몇몇 이들에게 이 책은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서술되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읽기엔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나에겐 정말 멋진 책이었으나.... 수십년 전 읽다가 그만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도 다시 꺼내 읽고, <<문명>>시리즈도 챙겨 읽어볼 생각이다. 무척 기대된다. 

 

 

 

**** 

* 한국에서 보수주의라고 하는 이들은 수구 꼴통들이며 한국식 관계주의의 노예들이며 심지어 극우에 가깝다. 그들에겐 일관성이란 전혀 없으며, 오직 자신들의 이익 보호와 함께 그 때 그 때마다 각기 다른 배경과 논지로 주장한다. 그래서, 가령 조선일보의 논설은 같은 조선일보의 논설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다른 보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서, 뭐라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들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한다면, 적어도 자신들의 주장이 시간과 무관하게 늘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야 된다고 믿는다. 그래야 보수주의다. 꽉 막힌 일관성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본 적 없다. 요즘엔 더 심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건 유튜브를 통해서다. 최근 보수 유튜버의 영상을 한 두번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 주장이 가지는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가지고 온 사실들을 조합해 만든 논리의 묘한 설득력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의 댓글들을 보면서, 꽤나 절망스러웠다. 그 정도로 사람들의 수준이 낮다는 거다.

 

** 모든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은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가상할 지경이지만, 이들 진보적 활동가의 노력으로 투표권을 받은 대중들은 독재자들을 지지했다. 반복적으로 대중의 지혜나 다수결이 가지는 장점을 강조하는 이들이 등장하지만, 마치 블랙 스완처럼 한 두번의 실패는 우리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만다. 그래서 다수결 원칙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증가하고 피로감이 늘어가고 있으며, 혹자들은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단정짓기도 한다. 이 점에서 나는 한국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옹립한 리더가 하는 정책들을 보라. 이 리더가 임명한 여러 인물들을 보라. 심지어 창조론을 주장하는 이까지 등장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 국적은 대놓고 일본이라고 한다. 실제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인과 동일한 국적을 주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끌려나간 무수한 조선인들이 아시아 각지에서 죽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초를 당했다. 시인 윤동주는 생체실험을 당하다 죽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일본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화교와는 전혀 다르다. 유태인이 580만명인데, 한국인은 720만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 상처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지만, 버젓이 친일 정부를 자초하고 있다. 독도를 지우고 있으며 대놓고 독립 운동을 부정한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 황당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얼마나 게으르고 무식하며 고통받았던 어제 일은 아무렇지 않게 잊고 앞으로 닥칠 내일의 고통에 대해선 걱정조차 하지 않는가. 그러니 민중의 역사 따윈 이야기하지 말자. 어차피 그들이 뽑은 리더이고 그들이 책임질 것이다(이렇게 나도 전혀 다른 의미에서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주석을 좀 달았다.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면 너무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서, 내가 이렇게 정치적이었나 싶을 정도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한다. 나는 이번 정권으로 인해 한국은 20년 이상 퇴보했다고 여긴다. 따라서 앞으로 10년이나 20년 동안 상당히 힘들 것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아, 다음에 들어설 정권을 욕하지 말아라. 그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정권이 만들어놓은 문제의 결과가 앞으로 계속 이어질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