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토 뻬스께라 크리안자, 2019, 스페인
Alejandro Fernandez, Pesquera Crianza
그러고 보니, 와인 라벨 색상이 바뀌었다. 아래처럼 나왔는데, 어느 새 위 사진처럼 바뀌었구나.
거의 이십년 전 남산 인근 카페에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에서, 아무렇게나 살던, 그 때 우연히 한국에 들어왔던, 그 때 처음으로 보고 마지막으로 봤던 형이 사준 와인이었다. 그 이후 한 두 번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모른다. 이십여년 전 나는 한창 와인을 시작할 무렵이었고, 그 때 마신 몇 병의 와인들 중 하나가 바로 틴토 뻬스께라였다. 그 때만 해도 신대륙 와인이 요즘처럼 유명하지 않았고 다양하게 수입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뻬스께라 크리안자는 템플라니요 100%인데, 이탈리아 템플라니요 와인과는 그 결이 다르다. 거칠고 무거운 느낌이 확실하다. 스페인 내륙의 황량한 느낌이랄까. 이 와인은 Ribera Del Duero 지역 와인이다. 이 지역 바로 위에 Rioja 지역이 있다. 이 곳 와인도 참 좋지.(Rioja 북쪽 지역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어져있다. 아! 가야지.)
어떤 술들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를 떠오르게 한다. 뻬스께라를 나에게 처음 소개한 그 형이 떠오르는 이유다. 새벽까지 머물렀던 그 명동의 카페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드물어졌다. 이런 점에서 술은 추억팔이 소품이다. 예전에 알던 미국 친구는 나에게 버드와이저 이야기를 하며 맥주 왕이라며 이야기하곤 한국에서 마시는 버드와이저는 미국에서 만들지 않아 맛이 다르다며 불평했다. 소주나 맥주는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그런 느낌이 덜하지만, 특정 종류의 와인이나 위스키는 그렇다. 칼바도스가 언제나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떠오르게 하듯이 말이다.
나에게 뻬스께라 크리안자는 거추장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실연의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술이다. 그 가을이 끝나고 참혹스러운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철없던 사람이 갑자기 철 들지 않듯이, 결국 봄은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사람만큼 변화에 역행하는 존재도 없다. 변화란 없다. 파르메데스가 그랬고 그의 제자 제논이 이야기했듯이 우리에겐 변화는 없다.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사랑을 할 일도 만무하다. 그러니 우리는 알지 못하는, 변화의 결과로 만들어질, 어떤 위대한 내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변하지 않는, 그 실연의 가을로 남아있는 어떤 어제를 두고, 철학자는 위대한 과거를 노래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언제나 있었으니, 그건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과거지향적이었다. (실은 요즘의 이론물리학에선 그렇다고 증명하긴 하지만)
기분 좋게 와인을 마시고 싶은데, 요 몇 달간 그러질 못했다. 내년이면 좀 나아지려나. 벌써 12월 말인데, 앞이 더 어두워졌으니, 걱정만 앞선다.
영업 전화 한 통 하고 퇴근한다는 것이 벌써 밤 9시가 지났구나. 아직 전화를 못했다. 퇴근 하기 전에 전화 한 번 하고 나가야겠다. 사는 건 고달프고 한 잔의 술은 위안이 되지만, 위안의 술은 씁쓰리하기만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