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황우석 사건들 속의 나

지하련 2005. 11. 28. 12:38



어제 낮에 주차 공간을 두고 나이든 아저씨와 나이든 아줌마가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아줌마는 남편까지 옆에 있었다. 아줌마는 싸움을 잘했다. 목소리가 컸다. 근처 집들 창문이 울릴 정도였다. 적절하게 속어를 사용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솜씨로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든 아저씨는 분을 참지 못하고 먼저 흥분하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질세라 아줌마도 멱살을 잡고 서로 이리저리 밀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다소 멀리 떨어져 있던 아줌마의 남편은 끼어들어 싸움을 말리기 시작하고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인다. 아마 그 광경만 보았다면 나이든 아저씨는 나쁜, 아주 폭력적인, 한국의 전근대적인 가부장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돼먹지 못한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이고 그 아줌마는 그와는 반대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난 멀리서 바라보면서 '이야, 저 아줌마 싸움 잘한다'하고 감탄을 할 뿐이었다. 확실히 싸움의 논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중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질 줄 알았고 적절하게 감정을 통제했으며 흥분할 땐 확실하게 흥분했다. 그에 비해 아저씨는 처음에는 차분하게 이야기하다가 아줌마의 적절한 대응에 갑자기 폭발해버리고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장면, 자신이 읽은 기사, 자신이 읽은 책이 전부로 믿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단편적인 것들이거나 단편적인 것들을 얼기설기 묶은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꼭 이 세상의 전부인 양 말하고 싸우고 윽박지른다. 그리고 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이러한 사람들이다. 왜냐면 이들은 언제나 다수였고 다수의 헤게모니를 믿으며 늘 서로를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보고 사건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정황들까지 따져 묻는 이에게 발언의 기회가 주었을 때는 그때까지 보고 파악한 것으로는 도대체 뭐라 말할 만한 의견이라는 게 나왔을 리 없었을 것이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사람들이 말하고 윽박지른 그 의견이 잘못되었으며 다른 방향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려고 할 땐 이미 사람들의 관심사는 딴 것으로 옮겨갔던지 이미 지난 일인데 아직까지 그걸 붙잡고 있는가 반문한다. 세상사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발언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거나 발언했을 때 세상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후다. 꼭 헤겔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난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요즘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둘러싼 상황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매우 착잡해진다. 원인이야 어떻게 되었던 황우석 교수의 연구팀은 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방식을 택했다. 이미 생명 연구에 따르는 윤리적 위험은 뉴스를 볼 줄 아는 이라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낙태 반대 집회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난자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는 윤리적으로 금기시되는 여러 부분들을 건드리는 매우 위험한 연구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들이 일어났다. 이에 황우석 교수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에 불과하다.

이미 현대 생명공학의 기술은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하는 이들에게 그렇다면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할까? 여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지 무척 궁금하다. 왜냐하면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근대주의의 마지막 거대 프로젝트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그 동안 종교나 윤리학자들이 세워놓은 생명 윤리들을 매우 위험한 상태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이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처럼 대상화되어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 점에서 대부분의 생명 공학 프로젝트는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종교나 윤리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따져 묻고 연구를 계속한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종교를 믿지도 않고 고매한 윤리학자도 아니다. 도리어 윤리학의 존재 근거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보는 편이다. 더구나 줄기 세포 연구는 대부분의 난치성 질병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그리고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지금까지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연구 결과물들을 발표하고 있다. 종교나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위험스러운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희망이고 현대 생명 공학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요즘 황우석 교수를 보면 그가 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꼭 현대 한국의 상징이고 난치병 환자들의 구세주이며 국가 영웅처럼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를 조장하고 있다. 우습다 못해 과연 제대로 생각하는 이들이 몇 명쯤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매우 황당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상황은 이미 우리들은 여러 번 경험했다. 운동권이 대학을 지배하고 있을 때, 데모를 하지 않으면 선배들에게 맞거나 과에서 왕따를 당했고 군대에서도, 직장에서도 줄을 서지 않으면 바로 ‘팽’을 당한다.

2002년 월드컵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축구 경기 시간에 맞추어 출퇴근 시간을 조정했고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축구 경기를 보며 흥분했다. 잠시 이성을 놓아두고 몰입하기에는 매우 좋은 때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2002년의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이 흥분하고 한국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고 몇몇 이해력이 떨어지는, 대학 때도 이해력이 떨어졌고 나이가 들어서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향수를 퍼뜨리기까지 했다. 이건 스포츠 경기가 줄 수 있는 정말 환상적인 일이다. 세상 일이 스포츠 경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황우석 교수의 프로젝트도 스포츠 경기이고 데모도 스포츠 경기이고 군대도, 직장에서의 패거리도 스포츠 경기라면 나도 확실하게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한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윽박지르는 방식은 매우 잘못된 방식이다. 하지만 이건 교과서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매도하거나 윽박질러야 된다. 무조건 떼를 이루어야 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된다. 되도록이면 거대 서사로 포장해야 된다. 그러면 이긴다. 역사가가 어떻게 평가하든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에라스무스가 제 아무리 뛰어나고 현명했다고 해도 그는 혼자였고 당대의 싸움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요즘 내가 처해있는 개인적 상황이나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이 꼭 룰 없는 스포츠 경기장 한 복판에 위치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무슨 일이 생겨서 경기가 시작되었으며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선수들 틈에서 주심을 찾기란 너무 어렵고 어렵게 찾은 주심은 선수의 한 주먹거리도 안 되었다. 오직 경기 결과만이 있었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 자는 관중석에 앉아 편안하게 구경하고 있었고 그 시선을 따갑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경기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구석진 곳에 앉아 멀뚱멀뚱 내가 왜 이 경기장에 나와있는 것일까 고민만 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도 이런 심정일까. 확실히 황우석 교수는 어떤 패거리 집단의 중심으로 만들기에 매우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도 어느 정도 그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그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제서야 그가 본연의 일로 돌아갈 절호의 찬스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 그가 하던 일은 연구이지 미디어 브리핑도, 국가 영웅도, 난치병 환자들의 구세주도 아니었다. 그가 하던 연구에서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다른 연구자가 결과물을 낸다면 다른 연구자가 난치병 환자들의 구세주가 된다. 그 연구자가 황우석 교수에 그늘에 가려져 있던 어느 지방 대학의 이름없는 연구자라면 아마 작금의 상황보다 더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도리어 황우석 교수를 욕하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그 많은 연구비를 지원 받아 놓고선 그럴싸한 결과물도 만들지 못했다고 하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회다. 그리고 늘 그래왔다. 문명이 시작한 이후부터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황우석 교수가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은 반-황우석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이 세력이 ‘소수’라면 조만간 제법 큰 세력으로 똘똘 뭉칠 것이다. 무조건 세력을 만들고 봐야 된다. 그리고 적절하게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언론을 이용해야 한다. 이 반대 세력도 거대 서사로 무장할 것이다. 이것이 싸움의 논리다. 난 거대 서사는 끝났다고 보는 편인데, 이거 큰 일이군.)

시간이 지나면 왜 그랬냐는 식으로, 우리가 진짜 그랬냐는 식으로 잊혀질 어떤 사건에 너무 민감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하긴 늘 있어왔던 일이고 앞으로 있을 일이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에서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 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다’고 적으면서 에라스무스를 떠올리며 ‘반드시 이성의 시대는 온다’며 책을 끝맺는다. 그런데 과연 이성의 시대는 올까? 나도 그것을 믿어왔던 모양이다. 확실하게 이성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오고 싶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보편 개념으로서의 신이 죽었고 신이 그 특유의 잔인한 성격을 드러낼 시기도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나도 거추장스러운 이성주의자의 옷을 벗어 던져야 할 것같다. 그러면 확실하게 내 삶은 편안해질 것이다. 철없고 몽상적인 삼십대를 벗어나 사회에서 인정 받는 철 있고 현실적인 삼십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흥분하고 매도하고 윽박지르며 살아야겠다. 언제나 목소리가 큰 다수의 편에 서야겠다. 남들 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야겠다. 그러면 룰 없는 경기장에서 벗어나 관중석으로 날아오르지 않을까.

글이 너무 두서가 없다. 비약이 심하다. 나도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징표가 아닐까. 그 싸움 잘하는 아줌마의 방식을 연구해봐야겠다. 사람들의 이해를 얻어가면서 싸움에서 이기는 방식 말이다.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의 두서 없음과 비약이 나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의 징표는 아닐까.

* 덧붙임.

그냥 읽을 만한 기사 하나.
http://search.edaily.co.kr/pop_article_view.asp?chknews=N&newsid=02010646576769328&curtype=r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