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 진형준

지하련 2007. 11. 24. 23:40


<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 형준(지음), 살림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지만, 정리되어 있다거나 분명한 논점을 가진 책은 아니다. 그래서 다소 맥이 빠지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는 다소 부적절해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문학평론가의 재능을 살려, 문학적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사상사, 예술사, 종교사의 내용이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따로따로 놀아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원론(dualisme) 대한 설명은 다소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성상에 대한 가지 태도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보이게 것인가, 보이지 않게 그대로 놔둘 것인가에 결정에 따라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한 설명은 이해되지 않는다.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먼저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자면 전적으로 이원론적 세계에 입각해있다. 그렇다면 일원론적 세계란 무엇인가?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이원론적 세계이고 선과 악은 하나다라는 것이 일원론적 세계인가? 그렇다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비, 또는 대립은 일원론적 세계 속에서는 해결되는 것인가? 성상에 대한 태도는 일원론적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실은 일원론적 세계에 대한 설명은 이해되지도 않지만, 책에서는 필요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으라고 권할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간단하게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에 대해서 설명해본다. 책에서 언급된 내용과 부분적으로는 같을 모르나, 전체적으로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고 기술했다.

 

성상파괴주의는 성상을 파괴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추상적인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로 있다. 따라서 추상적인 어떤 존재나 개념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할 있다는 태도를 배격한다. 이지적인 이해를 추구할 , 감각적인 수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도, 경험할 없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불경한 짓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추상미술은 성상파괴주의의 현대적 반영물인 셈이다. 점에서 현대는 성상옹호주의의 시대가 아니라, 성상파괴주의의 시대인 셈이다(저자는 성상옹호주의의 시대로 보았으나, 예술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틀린 해석이다).

 

이에 반해 성상옹호주의는 정도와 이해방식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누어질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정치적 예술에서 있듯이 추상적인 개념을 전형화 통해 옮길 있다고 믿는 태도도 있으며, 현실의 피폐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성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실제 중세 후반의 성상화의 회복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지, 그들의 사상적, 철학적 태도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크의 감각주의는 성상옹호주의를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있다. 이러한 감각주의는 변화를 거듭하여 인상주의에 이르는 추상적인 실재를 배격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게 된다. 추상적인 실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성상옹호주의라고 없으며, 도리어 기존의 관념이나 태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파괴주의라고 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여러 추상미술들은 현대적 감각주의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세계에서 경험할 없는 기하학적, 형이상학적 실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성상파괴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