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낭만주의에 대하여

지하련 2010. 1. 2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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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올바른 낭만주의의 이해를 위하여’(『세계의 문학』, 2002년 겨울호)
-「지금 우리에게 낭만주의란 무엇인가?―문학적 절대」, 필립 라쿠 라바르트, 장뤽 낭시
-「소설에 관한 편지」, 쉴레겔



김진수,『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 책세상





앙리 뻬르는 그의 책 <고전주의란 무엇인가>에서 ‘고전주의는 불안정하며 일시적인 ‘평형상태’이며, 곧 뒤이어 무질서와 불안이 뒤따르고 있으며 고전주의 자체도 혼란과 무질서의 시기에 뒤이어 온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즉 그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낭만주의는 혼란과 무질서의 시기에 등장하는 여러 유형의 미적 태도들을 통칭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고전주의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낭만주의 내에서 본다면 혼란과 무질서가 만들어내는 ‘이상’, 또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거나 혼란과 무질서를 관통해 지나가는 어떤 질서나 원칙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이 경우 낭만주의 내에서 어떤 고전주의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전주의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계간 <세계의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낭만주의라는 단어는 초기 낭만주의, 즉 노발리스와 쉴레겔이 주도했던 운동에만 국한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라는 소개글에서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어 읽는 이 스스로 그 사실을 파악해내야만 한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김진수의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를 읽을 필요가 있겠다. 그는 낭만주의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이면서 예술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어져온 어떤 태도를 뜻하며 하나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예술관의 정초로서의, 노발리스와 쉴레겔이 주도했던 초기 낭만주의로 나눈다. 그리고 김진수의 책이나 세계의 문학에 실린 두 편의 글은 이 초기 낭만주의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논의는 발터 벤야민의 견해대로 낭만주의라는 단어가 초기 낭만주의에서만 개념의 혼란없이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며 필립 라쿠 라바르트와 장 뤽 낭시 또한 이 초기 낭만주의를 ‘이론적 낭만주의’라고 칭하면서 벤야민의 견해를 수용한다. 하지만 이 낭만주의는 예술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낭만주의와는 본질적으로 틀리지 않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따라서 이 두 낭만주의가 서로 상이하거나 확연히 틀린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이 글은 그러한 바탕 위에서 씌어진 글이다.

<세계의 문학> 2002년 겨울호에 실린 필립 라쿠 라바르트와 장 뤽 낭시의 글은 그들의 책, <문학적 절대>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그들은 이 서문에서, <‘문학적 장르’에 대한 사유는 그러므로 문학적 사물‘의’ 생산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생산 ‘그 자체’에 관련되어 있다. 낭만주의 시는 포이에시스의 본질을 꿰뚫고자 하며 문학적 사물은 여기서 생산의 진리 그 자체를 생산해내며, 이 책의 뒷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자기 자신의’ 생산, 일종의 자기 생산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 생산이 사변적 절대의 궁극적 단계이자 완성을 이룬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낭만주의적 사유에서의 문학의 절대 뿐만 아니라 절대로서의 문학을 인정해야 한다. 낭만주의는 ‘문학적 절대’의 옹립이다>(*)라고 하면서 이는 낭만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와 전적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이 통상적인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아마 김진수의 견해와 비슷하리라 생각되는데, 그도 그의 책 서문에 <애수에 찬 회고적인 취향과 꿈결 같은 몽상적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낭만주의의 보수성’ 내지 ‘낭만적 보수주의’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불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낭만성과 낭만주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운동을 주창한 누구에 의해서도 주장된 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낭만주의는 그 문학적, 예술적 프로그램을 한층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것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파악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하고 있다.

필립 라쿠 라바르트와 장 뤽 낭시의 글만 읽어서는 낭만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내리기 어렵다. 차라리 그 다음에 실린 쉴레겔의 글이 독자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쉴레겔은 ‘낭만적이란 바로 우리에게 감성적 소재를 환상적인 형식으로 서술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감성적이란, ‘그것은 감정이 지배하는 곳에서, 더욱이 감각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신적인 감정이 지배하는 곳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감각적 흥분의 근원이자 영혼은 바로 사랑이며, 낭만적 포에지에서는 그러한 사랑의 정신이 도처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과 보이는 모습을 동시에 지녀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쉴레겔의 언급은 김진수의 책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의 문학에 실린 특집을 읽을 필요 없이 김진수의 책을 먼저 읽는 편이 좋다. 초기 낭만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김진수의 책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김진수는 낭만주의가 지니고 있는 반이성적이며 반계몽적인 특성에 주목한다. 그는 ‘낭만주의는 삶을 이성의 빛으로 조명하고자 하는데 반대한다. 오히려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삶을 신화로 만들고자 한다’고 평가한다. 즉 미적 근대성 프로젝트가 예술 자체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낭만주의는 그 극점에서 서 있는 운동이었고 이것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근대성보다는 탈근대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진수는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예술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보급되고 통용되는가에 대해선 깊이 있는 통찰이나 견해를 제시해주지 못한다. 도리어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낭만주의의 혁명성은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오로지 미적 측면에만 놓여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의 논의는 미적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으로 확대되고 만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낭만주의적 태도가 어떤 극점에 다다르면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연결된다. 즉 우리의 삶을 상상력과 환상으로만 채우려고 할 때, 정치적으로는 매우 관심해지며 삶을 개선시키고자하는 실천적인 과제에서 멀어진다. 김진수의 책이 낭만주의에 대해선 매우 잘 정리되어있는 책이지만, 거리 위에서 건물 속에서, 혹은 논밭이나 공장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을 상상력과 환상으로 채우려고 했던 쉴레겔과 노발리스는 매혹적이긴 하나, 우리의 고단한 삶을 실제로 구원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진수가 언급했던 낭만주의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낭만주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낭만주의 연구자로서 김진수는 낭만주의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벗겨내는데 노력을 해야겠지만, 낭만주의가 지니고 있는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진수가 인용한 만프레드 프랑크의 견해는 귀담아들을 만 하다. “사변이 성찰을 통해 절대적인 것에 이르려는 요청을 포기하는 철학을, 그리고 이러한 결핍을 예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보충하려는 철학을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낭만주의 예술론은 예술을, 미적 직관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명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문학적 절대’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낭만주의 속의 어떤 이상주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김진수의 언급 : ‘미적 직관을 절대화함으로써 야기되는 미와 예술의 절대성에 관한 이론이 낭만주의의 (미적) 근대성을 특징짓는다’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을 넘어서 예술의 절대성을 추구했던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이념에 대한 것이다. 이 경우 두 명의 프랑스 저자들은 이러한 절대성 추구에 많은 의미를 부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2010.01.28) 요즘 키신(Kissin)이 연주하는 쇼팽을 들으면서, 자주 낭만주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 전에 낭만주의에 올렸던 포스팅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업데이트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