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봄날의 문자 메시지

지하련 2004. 3. 22. 10:43


군대를 벗어난 지도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느새 민방위이다. 넓은 영등포 구민 회관 입구 쓰레기통에다 민방위 관련 책자를 놔두고 왔다. 강당 앞쪽에 앉아 있는데, 몇 통의 전화가 왔고 몇 개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신기한 일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전화와 문자메시지. 보통 때라면 오지 않았을.

바람은 너울치듯이 나무가지 앉았다가 지붕에 앉았다가 전신주에 앉았다가, 그렇게 봄을 심어놓으면서 지나가고 도시의 퀘퀘한 매연 틈 속에서 햇살은 곧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후 두 시 반. 주머니 속의 핸드폰으로 문제 메시지 하나가 와있었다.

"그대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이 멍에가 되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 미안하구요."

낯선 전화번호. 누구일까. 누구였을까. 그리고 민방위 교육 사이 쉬는 시간, 누구신가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 네 시 쯤,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낯선, 삼십대 후반이나 더 이상되어보이는 지쳐가는 가느가란 목소리의 여자. 무슨 사랑인 것일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전화번호를 남기지 않은 어떤 메시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봄날의 사소한 표정만큼의 관심이 자기에는 왜 없냐며 물었던...

그 여자는 나에게 문자를 잘못 보내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그 여자가 사랑하는 이는 누구일까. 그러고 보니, 저런 문장을 문자로 보낼만큼 그 여자의 마음은 여리고 감동적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사랑에 슬퍼하면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정면성'이라는 게 있다. 이집트 미술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이 단어는 사랑에 빠진 남녀에게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사랑을 나누기 전에는 그 사랑 앞에서 한없이 주눅이 들고 자신의 사랑이 훼손당할까 두려워하며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거릴 때 나타나며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는 사랑이 떠나갈까봐, 혹시 배신을 당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다가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도리어 그것에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견디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야의 까페에서 혼자 맥주병을 세워놓고 새벽까지 우는 것이다.

봄날 오후, 낯선 여자의 목소리 속에서 그 날 심야의 까페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여,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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