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리타 카벨뤼(오페라), 임상빈(선컨템플러리), 스벤 드루엘(마이클슐츠), 홍성철(금호크링)

지하련 2008. 11. 8. 14:09

길을 걸었다. 딱딱한 보도블럭에 부딪히는 느낌이 좋았다. 좋았을 거라고 내 스스로 추측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두 다리와 발은 내 걷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잔뜩 불평을 쌓아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걷기가 우아하고 즐거우며 보들레르나 벤야민의 '산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서울에서의 걷기는 가장 적당치 않다. 먼저 공기가 좋지 않다. 건널목에서는 기대 이상의 기다림을 푸른 불빛에게 할애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아주 짧은 시간 넋을 놓고 걸어가다간 차에 치여 죽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다. 서울의 이런 형편없는 운전문화로 인해 '서울에서의 걷기'는 우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불행하게도(불쾌하게도) 내 정신은 걷기에 익숙해져 있다. 내 육체는 아닐지라도.

청담동 네이쳐포엠 빌딩은 이번이 2번째 방문이었다. 벨기에에서 온 작가와 오페라 갤러리를 간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 이후 몇 달 동안 청담동은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대학 시절 번질나게 드나들던 때와는 사뭇 비교되는 일이긴 하다.

사간동은 근처의 고궁이나 구석구석에 숨겨진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현대적 분위기의 갤러리를 받쳐줘, 제법 분위기가 있지만, 청담동은 아직 어딘가 모르게 낯설고 기괴하며 다소 값싸보인다. 서구적인 현대를 나름대로 소화시키려고 하였으나, 그것을 제대로 알 지도, 익숙하지도 않는 서울 (강남)사람들의 구미를 맞추다보니 다소 이상해졌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런 느낌이 든다.

다행히 이번에 간 오페라 갤러리는 나쁘지 않았다. 첫 방문 때에는 전형적인 상업 화랑의 느낌이 너무 풍겼다. 작품들은 전시를 위해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판매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 했다. 그 땐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좀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몇 명의 유럽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작가는 리타 카벨뤼(Lita Cabellut)였다(이런 스타일의 페인팅은 유럽의 작가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리타 카벨뤼의 장점은, 오페라 갤러리의 설명문에서 언급하듯,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상처와 고독에 주목하며 이를 작품으로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유화에 산을 섞어 표현한 독특한 화면 처리'에 있다. 즉 그녀는 회화가 가지는 평면성을 연구하면서, 그 위에 인간 존재의 깊은 심연을 독특하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초상화는 상처입은 영혼을 담아내는 듯 거친 구성과 질감, 슬픈 눈빛으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cabellut
http://www.litacabellut.com/cabellut/ 

Cuba 3
그녀의 홈페이지에서 복사해왔다. 실제 작품은 사이즈가 매우 크며, 표면 처리가 매우 독특하다. 따라서 모니터에서 보는 것과는 작품의 느낌은 완전히 틀리다. 어쩌면 모니터에서 보는 느낌이 다소 부드럽지만, 실제 작품은 까끌까끌하며 상처입은 현대인들의 내면을 옮기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같은 빌딩의 선 컨템플러리의 '임상빈' 전시도 주목할 만하다. 갤러리의 안내문에서처럼,  그는 '디지털에 익숙한 전형적 세대의 작가로써 아날로그와 디지털, 실제와 허구, 개념과 실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래서 그가 담아내는 풍경은 현실 속에서 시작하나 가상을 향하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일상) 공간은 어디인가요?'라고 묻는 듯하다. 미묘한 현대성, 혹은 동시대성을 그 나름의 시각으로 포착하면서 우리가 보는 공간과 우리에게 보여지는 공간, 혹은 우리가 만드는 공간에 대해 묻고 탐구한다.

내 눈에 모든 작품들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와 탐구는 충분히 의미심장한 것이었고 몇몇 작품들은 꽤 좋았다.

Sangbin Im, Road 1, 101.6x177.8cm, Lambda Print Diasec, 2008
출처: http://www.suncontemporary.com/ 


우리가 보는 어떤 공간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마이클 슐츠 갤러리의 'Sven Druehl'의 전시도 볼 만한다. 기하학적 공간(건물) 옆으로 대비되는 초록의 자연은 낯설면서도 신비감을 던져준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 특이한 공간의 대비는 현대성이 가지지 못하는 어떤 원초성을 전해주는 듯하다. 특히 그의 표면 처리는 꽤 흥미로워서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시각적 즐거움도 선사한다. 이런 이질적인 풍경화는 현대의 풍경화가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준다(이런 풍경화를 볼 때마다 화가 명함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작가들이 그리는 풍경화를 떠올리면 매우 슬퍼진다. 숲 속 풍경이나 동구 밖에서 본 마을이라든가, 들판 따위들 말이다).

 

Sven Druehl, SDFLW III (2007), 1800x1300mm, Acrylic on canvas
(출처: http://www.galleri-se.no/artist/sven_druhl/ )


금호건설이 야심차게 지은 문화복합공간인 kring(www.kring.co.kr)에서는 설치작가인 홍성철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미디어 기술 속에서 홍성철은 적절하고 시사적인 설치 작업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느다란 줄에 프린팅된 사람의 육체는 무수한 줄들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하나이면서 무수히 조각한 것이이며,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작품의 앞과 뒤, 옆이 다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흥미로움은 우리 인생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삼성역 근처에 거주하고 있다면 이 kring에 가보는 것도 꽤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층의 카페테리아의 커피는 제법 좋았다. 역시 커피는 에스프레소로 먹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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