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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옮김), 비채 




원제는 <Revenge of the Lawn>이지만, <잔디밭의 복수>보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가 더 나아보인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하지만 이 책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단편은 <잔디밭의 복수>.


잭은 할머니와 30년이나 같이 살았다. 내 친할아버지는 아니었고 플로리다에서 물건을 팔던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잭은 사람들이 사과를 먹고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영원한 오렌지와 햇볕에 대한 비전을 파는 사람이었다. 

잭은 마이애미 다운타운 근처에 있던 할머니집에 물건을 팔러 왔다. 그는 일주일 후 위스키를 배달하러 왔다가 30년을 눌러 살았으며, 그 후 플로리다는 그 없이 지내야 했다. 

- <잔디밭의 복수> 중에서 

(* 위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브라우티건은 사물의 관점에서 종종 서술하는데, 꽤 흥미롭다. '플로리다'(지명)를 의인화하여 '그'(잭) 없이 지내야했다'고 표현한다.)


아주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브라우티건의 소설집,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연작처럼 읽히기도 하고 산문으로 된 시같기도 하며, 그냥 수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소설이다. 


브라우티건은 이제 잊혀져가는 이름이다. 육칠십 년대(히피들의 시대) 활동했던 미국 소설가. 


반-문명, 반-도시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해서 김성곤 교수는 '생태문학'으로 몰고 가지만(히피 시대가 생태주의 시대였는지도), 실은 문명 안에서, 도시 안에서, 쓸쓸함, 외로움, 고독을 어쩌지 못해, 버림받았다는 당혹스러움이나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이 몰려들어 그 공간 - 문명 속의 도시 - 를 비틀고 조롱하며, 급기야는 고개를 돌리고 피하고 도망쳐서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하필 그 곳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숲이거나 강가라고 해서 '생태문학'으로 일반화시키면,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죽기 직전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이 매우 섭섭해 할 것이다. (*나도 한 번 브라우티건을 따라서...)


여자들이 검은 고무 잠수복과 광대 같은 모자를 착용하니까, 참 예뻤다. 수박을 먹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캘리포니아의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빛났다. 

-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 짧은 글 속에 숨겨진 문명/도시에 대한 조롱, 무책임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폭로를 넘어서 서정적이면서도 단조롭고 견고한 산문 때문이다. 하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알고 읽는 독자는 드물기만 하고.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어디론가, 저 멀리 휩쓸려 떠내려가는, 질서와 합리성으로 포장된, 위선적인 도시의 비정한 일상 속에서 브라우티건을 읽는 건, 브라우티건을 손에 들고 다니는 건 상당히 우습고 위험한 일이다. 다행히 수십 년 도시 생활 중에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들고 있는 이는 본 적 없으니, 아직 이 도시에는 도시를 극도로 싫어하는 반-도시적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니, 도시는 아직 안전하다(하지만 나는 도시가 싫다).


핏빛 다툼 


"바이올린을 배우는 남자와 새너제의 원룸에서 같이 사는 건 정말이지 힘들답니다." 그녀가 탄창이 빈 연발권총을 경찰에게 건네면서 한 말이었다. 


(번역: 김성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은 도시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문명의 불빛에. 


나무들은 한 때 공동묘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낮의 울음과 술픔의 일부였으며 바람이 불 때를 제외하고 밤의 정적의 일부였다. 

- <소녀의 추억> 중에서 



- 1970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아파트 욕조에 앉아 있는 브라우티건


- 1971년에 나온 <잔디밭의 복수> 초판본 표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 




그건 마치 종교음악처럼 들렸다. 내 친구 하나가 막 뉴욕에서 돌아왔는데, 거기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가 그의 작품을 타이핑해주었다고 했다. 

그는 성공적인 작가였고, 그래서 뉴욕에 가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를 만나 타이핑 서비스를 받는 최상의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고, 허파에 침묵을 대리석처럼 수놓을 만한 일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라니!

그녀는 모든 젊은 작가들의 꿈이었다. 마치 하프를 타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 원고를 바라보는 완벽하고 강렬한 시선, 그리고 심오한 타이핑 소리.

그는 시간당 15달러를 지불했다. 그건 배관공이나 전기공의 보수보다도 더 많은 액수였다.

타이피스트에게 하루에 120달러라니!

그는 그녀가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저 원고를 넘기기만 하면 그녀가 철자 점검이며 구두점을 너무나 아름답게 처리해서 그걸 보면 눈물이 나게 되고, 그녀가 만든 문단은 우아한 그리스 신전처럼 보이며, 그녀의 문장은 완벽했다고. 

그녀의 헤밍웨이의 소유였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였다. 


(번역: 김성곤) 



아, 그런데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라니! 나는 너무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읽었다. 



* 위에서 인용된 두 편의 단편, <핏빛 다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는 단편 전체다. 그래서 밑에 역자를 표기하였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 10점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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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Dance of the happy shades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지음), 곽명단 (옮김), 문학에디션 뿔, 2010


앨리스 먼로. 작가로 데뷔한 직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로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1968년에 출간된 그녀의 첫 단편집. 

'옮긴이의 말'에서 옮기자면, '여러 해 동안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소설집.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책이다.

젊었던 그녀가 쓴 단편들이 모인 책이다.


로이스는 치맛자락을 떨어뜨리고 손바닥으로 내 따귀를 후려쳤다. 나를, 아니 우리 둘을 건져준 따귀였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한바탕하고야 말겠다고 내내 벼르고 별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156쪽 


이 짧은 문장만으로 이 소설집, 혹은 이 단편, <태워줘서 고마워 Thanks for the Ride>를 전달하긴 어렵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일보다 지금, 당장, 오늘 밤을 쓸쓸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젊음들이 서로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갈등을 해소하는 장면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1950~60년대 캐나다의 작은 도시들, 어쩌면 그보다 더 작은 마을들을 배경으로 앨리스 먼로는 누구나 겪게 되는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전에 읽었던 그녀의 단편집에선 우리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에선 성장하면서 결국 홀로 부딪히며 극복하게 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먼로의 경험담이 묻어나온 건 아닐까.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소설집에 비해 더 쓸쓸하고 외롭고 거칠고 황량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가거나, 그래서 결국 실수하게 되고 후회하고 아파한다. 적당한 착각과 위로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아는 까닭에 독자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거나,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는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가끔 대도시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 살다가 대도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들의 감수성이 궁금하기도 하다. 앨리스 먼로의 감수성은 지방 중소 도시의 그것이다. 한 두 명만 건너면 다들 아는 어떤 공간.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결국엔 포기하거나 잊거나 모른 척하거나, 그러면서 인생이 내미는 손을 잡고 살짝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석양을 행복하게 바라본다고나 할까. 결국 아프지만, 아팠지만, 지금 옆에 누군가 있긴 하니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가진 장점이다. 그래서 다 읽고 난 다음 쓸데없이 우울해지거나 시니컬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느 소설보다 더 산뜻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하면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 - 10점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뿔(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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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앤드루 포터 Andrew Porter (지음), 김이선 (옮김), 21세기북스 

http://www.andrewporterwriter.com/ANDREW_PORTER/Andrew_Porter_-_Writer.html




연거푸 영어권 작가들의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 줌파 라히리, 앨리스 먼로, 그리고 앤드루 포터. 그들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차이보다 보이지 않는 공통점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건들과 인물들을 사이에 서서, 그 숱한 감정들에 휩쓸리지 않으며, 쓸쓸한 냉정을 유지하며, 아파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사랑을, 혹은 미래를 믿으며 살아가는(남는) 것... 어쩌면 21세기 초반 동시대 단편들이 가지는 특징일까.  


그리고 앤드루 포터에게서는, 사건 속에 있지만, 사건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판단내리지도, 결정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과 만나게 된다. 


절망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은 모습. 그렇게 그저 사라질 뿐인 우리들의 모습. 한때 마음 속 깊이 사랑했지만(아니면 사랑이 아닌 어떤 사랑인지도 모를), 단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불륜의 연인처럼. 



로버트의 와인을 마시면서 거기 어둠 속에 앉아, 결국, 어쩌면 몇 시간 동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에 나는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 131쪽 



소설 속에선 아직 추억으로 펼쳐지지만, 끝내 망각될 흔적이다. 


서로에게 입히는, 혹은 스스로 입는 상처에 대해 알지만, 아는 것과 그 상처를 치료하는 것, 그 상처에 반항하고 저항하는 것은 무관하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다르고, 이제 만나지도 않는다. 아는 것은 그저 아는 것일 뿐이고 움직이는 것은 그저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빛과 물질은 다르고, 빛은 물질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빛이 한 번도 가 닿은 적이 없거나 물질이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부정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견디기 힘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무섭고,이미 떠나버린 그가,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오는 것이 두려워, 내가 먼저 떠나는 것으로 꾸미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믿지만, 이젠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 조금의 노력으로도 실체를 알 수 있음에도, 그래서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 사랑 앞에서 사랑을 부정하는 것. 미래 앞에서 과거를 핑계삼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앤드루 포터의 소설들은 휴머니즘을 버리지 않지만, 휴머니즘 앞에서 한없이 주춤거린다. 그는 무척 힘들게 이 소설들을 썼을 것이고 지금도 참 고통스럽게 글을 쓰고 있을 게다. 


주춤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21세기의 도시는 우리에게 생의 열정 대신 병든 마음까지 치료한다는 정신의학과 배 고프면 언제든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시설들을 가져다 놓았으니,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그걸 알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는(외면한) 상태다. 


끝없이 주춤거리다, 주춤거리다, 죽을 생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할 생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8점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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