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3

에밀 시오랑, 언어의 위축

우유부단한 자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단편적인 사실과 흔적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우리는 실제 사례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임상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한 작가가 침묵했던 것,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 그 말하지 않은 것의 깊이이다. 작가가 어떤 작품을 남겼다면,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면, 우리는 분명 그를 잊을 것이다. 자신의 환멸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고 그대로 사라지게 내버려둔 실패자, 그 실패한 예술가의 운명 ... - '언어의 위축', 에밀 시오랑, (김정숙 옮김, 문학동네)중에서 퇴근한 후, 책상 위에 놓인 책 첫 구절을 옮겨놓는다. 20세기말 르몽드에서 불어로 가장 아름다운 글을 남긴 작가들 중 5위 안에 속했던 철학자인데, 국내에선 거의 읽히지 않..

저지대, 헤르타 뮐러

저지대 -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문학동네 저지대 헤르타 뮐러(지음), 김인순(옮김), 문학동네 참 오래 이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오래 읽은 만큼 여운이 남을 진 모르겠다. 번역 탓으로 보기엔 뮐러는 너무 멀리 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그녀의 양식이 낯설다. 자주 만나게 되는 탁월한 묘사와 은유는, 도리어 그녀의 처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그녀는 의미의 망 - 단어들을 중첩시키고 시각적 이미지를 사건 속에 밀어넣어 사건을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상처 입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인물들 마저도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그녀의 작법은 시적이며 함축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답답하고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굴의 모든 낱말은악순환..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원제 :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에디터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남은 채 파리 어느 다락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인 어떤 매력을 풍긴다. 또한 그의 프랑스어는 어느 잡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문장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매력, 그의 문장만으로 그를 좋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가지는 인생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유일한 사항은 생에 기대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 재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