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7

얼론 Alone, 에이미 션, 줌파 라히리 외 17명

얼론Alone 에이미 션, 줌파 라히리, 제스민 워드, 마야 샨바그 랭, 레나 던햄 저 외 17명(지음), 정윤희(옮김), 혜다 책을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서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텐데, 찾지 못한 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은 집 근처 구립 도서관에서 빌려 읽던 중이었는데, 어딘가 두고 잃어버렸다. 서가와 바닥에 놓인 책들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쌓인 책들 사이의 공간은 끝이 없는 미지의 세계다. 때는 업무가 밀려 드는 늦가을이었고 대출 기간을 넘겨 연체를 하던 중, 연체 안내 문자를 보고 부랴부랴 책을 찾았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나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가끔 있는 일이긴 하다. 가지고 있던 책을 다시 사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결국 찾지 못해, 새로 구입했다. 도서관에선 ..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지음), 송태욱(옮김), 문학동네 첫 책이 61세 때 나왔고, 그로부터 8년 후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살고 결혼했으나, 이탈리아인 남편이 죽자 1971년 일본으로 귀국해 일본문학을 이탈리아로 번역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문학을 일본에 번역 소개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5년 정도가 흘렀다. 어쩌면 그녀는 일본의 전성기를 살았던 문학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시선, 혹은 태도. 세상과 문학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인 양 표현하고 있기에 스가 아쓰코의 수필들은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929년 생이니, 그 당시 한국..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지음), 송태욱(옮김), 뮤진트리 어쩌다 보니 언제나 옆에 두고 읽는 작가들은 정해져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다. 십수년 전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 지금도 오에의 소설이나 수필집을 읽는다.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면서 나아가 세계적인 소재나 주제까지도 이야기하며 소설을 쓰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일본 내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이다. 실은 오에 겐자부로가 왜 정치적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정부 인사처럼 보일 듯 싶다. 가끔 일본 지식인 사회가 일본 정치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건..

일본산고, 박경리

일본산고日本散考 박경리(지음), 마로니에북스 어수선하다.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만 한국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촛불을 들고 탄핵을 지지했다고 해서 근본이 바뀌진 않는다), 또한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져 온 진보와 퇴보의 순환 속에서 지금은 퇴보의 순간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그랬다. 바진의 에 아우슈비츠가 날조된 거짓이라고 믿는 서독 청년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한국이 똑같은 꼴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때문일 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의 난무는 진짜 정보(진실)마저 사라지게 하며 가짜 뉴스를 믿는 사..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L’homme joie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지음), 이주현(옮김), 1984북스 (…)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168쪽)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어쩌면 이 문장만으로 몇몇은 이 책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도록 시적이며 감미롭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어지는 이 책은 잃어버린 자연과 신비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노래한다.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테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처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

십분의 일을 냅니다, 이현우

십분의 일을 냅니다 이현우(지음), 알에치코리아 와인을 좋아한다. 와인바에 자주 갔다. 와인을 마신 지도 벌써 이십년이 넘었구나. 그 때와 비교해 와인이 참 많아졌다. 이젠 일반적이다. 원두를 갈아 드리핑해서 마신 지도 십 수년이 지났다. 이것도 이제 대중화되었다. 일반화되고 대중화된다는 건 한 편으론 반갑고 한 편으로는 싫다. 한 땐 아는 척이라도 했는데, 지금은 아는 척 하기 쉽지 않다. 이 책은 을지로에 있는 와인까페 '십분의일' 창업기(?) 비슷한 책이다. 드라마 PD로 있던 직장인이 어떤 계기로 아는 이들과 함께 창업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서관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같아서, 혹시라도 내가 카페나 와인바 같은 걸 창업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읽었다. 그냥 읽을 만했고 솔직담백한 ..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지음), 이승수(옮김), 마음산책 극히 일부의 작가들만 여러 개의 언어로 글을 썼다. 또한 어떤 작가들은 모국어 대신 다른 언어로 글을 썼다. 사무엘 베케트는 영어와 불어로 글을 썼다. 대표작인 는 불어로 먼저 썼고 후에 스스로 영어로 번역했다. 조지프 콘래드는 모국어인 폴란드어 대신 영어로 글을 썼으며, 러시아 태생의 나보코프도 영어로 글을 썼다. 나보코프는 어렸을 때부터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의 영어 문장은 압도적이다. 루마니아 태생의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로 글을 쓰다가 아예 파리에 정착해 불어로만 글을 썼다. 그의 불어 문장은 20세기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줌파 라히리도 모국어는 뱅골어지만, 어렸..

시선들, 캐서린 제이미

시선들: 자연과 나눈 대화 Sightlines 캐서린 제이미(Kathleen Jamie), 장호연(옮김), 에이도스 스코틀랜드 시인 캐서린 제이미의 수필집이다. 책 뒷표지에 실린 여러 찬사들과 이 책이 받은 여러 상들로 인해 많은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어쩌면 번역된 탓일지도 모른다. 역자의 번역이 아니라 캐서린 제이미의 언어가 한글로 번역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역자는 이미 에드워드 사이드의 를 탁월하게 옮긴 바 있으니, 도리어 믿을 만한 번역가이다. 이 수필집은 캐서린 제이미의 두 번째 모음집이며, 영어권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영어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연사(自然史)와 연관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들은 ..

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나의 삶이라는 책 The Book of My Life 알렉산다르 헤몬Aleksandar Hemon(지음), 이동교(옮김), 은행나무 나는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 151쪽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없다. 학살과 인종 청소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끔찍한 전쟁이었다는 정도. 우리와는 너무 멀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사라예보라고 하면 탁구선수 이에리사와 제 1차 세계대전을 떠올릴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하나, 그 끔찍함으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실은 한국전쟁이 더 끔찍한데, 이것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알렉산드르 헤몬Aleksandar Hemon은 내가 처음 읽는 보스니아 작가다. 티토가 극적으로 통합한 사회주의국가 유고슬..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지음), 유예진(옮김), 은행나무 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독서'에 대한 수필집은 아니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책들을 불어로 번역하면서 쓴 에세이들(역자 서문이나 해설)로 짧게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 나머지는 모두 화가들에 대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글들로 인해 이 책을 구입했다. 때때로 우리는 미술평론가나 철학자(미학자)가 쓴 예술론에 실망하고 그 대신 소설가나 시인이 쓴 어떤 글들로 놀라고 감동받는다. 이 책도 그렇다. 그렇지 않더라도 프루스트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은 없을 테니.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설가가 되기 전 젊은 시절의 마르셀 프루스트는 존 러스킨에 심취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