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11

여름 휴가

잠시 집 밖으로 나갔다가 땀에 젖어 들어왔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난 다음이었다. 던킨도너츠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왔다. 드립 커피를 내려 먹을까 하다가, 그냥 샀는데, 탄내가 훅 올라왔다. 불쾌한 느낌까진 아니지만, 원두 특유의 향을 해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이런 커피를 마실 때마다 부주의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개시하기 전에 마셔보면 알 수 있으니, 원두를 다시 섞는다거나 반품하거나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내가 민감한 건가.  기후 문제가 전세계적으로 이슈다. 위기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하긴 한국은 독재화 진행 국가로 이름을 올린 채, 뭐, 그리 잘났다고 이러고 있는 건지 알 턱 없구나. 한 정부의 여러 잘못들은 십년이나..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결혼 - 여름알베르 카뮈(지음), 장소미(옮김), 녹색광선   카뮈의 산문집을 읽는다. 몇 해 전 >를 읽은 후 다시 카뮈를 손에 들었다. 몇몇 문장들은 처연하게 아름다워 슬펐다. 카뮈의 세계는 역동적이지만, 죽음을 향해 있다. 무의미 앞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살아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태양과 죽음은 만난다. 잠시 후 압생트 풀밭에 몸을 던져 그 향이 몸에 배게 할 때, 나는 모든 편견에 맞서 진리를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진리는 태양의 진리이고, 또한 내 죽음의 진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내가 지금 내거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 삶. 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고

서구의 어느 기상학자는 한반도는 4계절이 아니라 5계절이라고 말한다. 봄, 장마(우기),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4계절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에는 우리가 정의내리지 않는 어떤 계절을 지금 지나고 있다. 다행이다. 비가 내려서. 그래서 내륙의 가뭄이 사라지길 기원한다. 봄이 지나자 더위가 밀려들었다. 더위의 위세로 인해 사람들은 기가 죽고 짜증만 낸다. 나도, 아내도, 아이도, 짜증의 바다를 지나며 서로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빨리 지친다. 프로젝트 상황이 난감해진 지금,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노력 중이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에서 '리추얼ritual'을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같은 활동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었다. 독일의 한병철은 리추얼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한 쪽에서는 리추얼의 부활을 말한다...

2021년 8월, 사무실 오후 8시 38분.

서재에 있는 오디오로 음악을 듣지 못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서재에 에이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더위 속에서 책을 읽을 그 어떤 여유도 나에겐 없다, 없어졌다. 물질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면 정신적으로나마 여유롭길 바랬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고 어느 정도 실패라든가 아픈 것이나 후회하는 경험들이 쌓이자, 물러서지 않는 원칙 같은 것이 하나 둘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프로젝트는 망가지더라도 사람을 잃지 말자'다. 그런데 막상 (나도 모르게) 프로젝트를 챙기다보니, 사람을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너무 힘들다.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야 했는데, 그걸 잊어버렸다. 그만큼 믿기도 했겠지만, 늘 그렇듯 말 없는 믿음보다 말 있는 믿음이 더 낫다. 프로젝트 규모가 커졌다...

늦여름 속 추석을 보내고

나이가 들수록 명절 보내기가 더 어려워진다. 내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는지 모르겠지만. 과거는 화석이 되어 이젠 향기마저 풍기지 않고 미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끝도 보이지 않는 계곡 사이로 이어진다. 중년이라 그런 건가. 돌파구는 늘 위기에 있다지만, 우리 인생은 늘 위기 위에 있다. 올웨이즈 리스크 모드라고 해야 하나. 음악을 들었지만, 예전같은 감동을 찾기 어려웠다.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가을이 왔다고들 말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끔찍했던 여름이 이어져, 계속 지치고 땀이 나고 흔들거린다. 그래도, 기어이 가을은 올 것이고, 그래도 나는 나이가 계속 들어갈 것이고, 그래도 내 아이는 계속 자라날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푸른 곰팡이, 이문재

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중에서 이문재의 (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

여름 소식, 파울 첼란

여름 소식 파울 첼란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빈 행(行).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 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 전영애 옮김, (민음사) 중에서 이렇게 다시 시집을 읽을 줄 알았다면, 그 많던 시집들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외국 시를 읽게 될 줄 알았다면, 지금 나오지 않는 번역 시집을 사두고 버리지 말 걸, 이렇게 외국 시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될 줄 알았다면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둘 것을... 이번 주 내내 파울 첼란의 시를 읽었다.

카페, 프로젝트 사무실, 쓸쓸한 일요일

1.너무 화창한 일요일, 사무실에 나왔다. 일요일 나가지 않으면 일정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애초에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잘못된 채 시작되었다. 하긴 대부분의 IT 프로젝트가 이런 식이다.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제대로 기획되었더라도 삐걱대기 마련이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사무실에 나와 허겁지겁 일을 했다. 오전에 출근해 오후에 나와, 여의도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긴 아까운 날씨였다. 그렇다고 밖에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시를 보러 가긴 너무 늦었고 ... 결국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책이나 읽다 들어가자 마음 먹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5월 햇살은 따스함을 지나 따가웠다. 봄 무늬 사이로 뜨거운 여름 바람이 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처녀들의 얼굴엔 미소가 ..

내 젖은 구두 벗어 ...

지하철에서 내리자 마자 비가 와락!! 다 젖었다. .. 그리고 이문재의 시집이 떠올랐다. 오늘 해가 뜰려나. 오후는 내내 외근인데..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이 문재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여름-절망'에서 '가을-희망'으로

피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 집에 오니, 밤 12시가 가까이 되었고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상태다. 하긴 내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딱딱한 걸 먹으면 안 되는데, 맥주 몇 잔에 딱딱하다 못해 씹혀지지도 않는 오징어 뒷다리를 안주 삼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상 속에 내 온 몸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 올해 그런 여유가 생길 지 모르겠다. 여름, 뜨거운 절망을 뒤로 하고, 가을, 내년을 위한 희망을 꿈꾸어도 좋을 시기다. 몇 번의 주말 오후, 핸드폰으로 늦은 오후 석양 아래의 서울을 찍었다. 내가 가진 니콘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있지만, 지금 PC에 옮기기가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