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33

오징어뼈, 에우제니오 몬탈레

출근길에 시집 한 권을 챙겨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 시집을 읽는 건 너무 낯설어서, 꺼내지도 못했다. 이는 사무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시집을 읽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로만 했다. 어쩌면 모든 시는 위기의식으로 만들어지듯, 모든 시 읽기는 현대적 공간에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시를 읽는 나는 물신적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21세기 현대적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 같았다. 한 때 내 모든 것이었던 시는 이제 시 읽기조차도 어색해진 상황이 되었으니, … 그런 내가 들고 나온 시집은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오징어뼈’였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의 시는 번득이는 슬픈 유머와 깊은 통찰, 그리고 나와 너, 자연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서..

저주받은 성, 파블로 네루다.

저주받은 城 파블로 네루다 지금 (추원훈 옮김) 내가 걷고 있는 동안 보도블럭은 내 다리를 두들겨 패고 있고, 별들의 찬란한 빛은 내 눈을 부숴뜨리고 있다. 창백한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 자욱을 남기고 비틀거리며 가는 마차에서 밀알이 떨어지듯 갑작스레 내게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오오 누구도 결코 챙겨 놓지 않은 길 잃은 생각들, 말이 내뱉어졌다면, 느낌은 내부에 남아있는 법. 여물지 않은 이삭, 악마는 그것을 공간에서 발견할 테지, 나는 망가진 눈으로 그걸 찾으려 들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리라. 나는 망가진 눈을 하고 끝없는 길을 쉬임없이 간다… … 왜 생각의 길을, 왜 헛된 삶의 길을? 바이올린이 부서지면 음악이 죽어 버리듯 내가 손을 움직이지 못할 때면 내 노래도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내 가슴 깊은 ..

청담

청담(淸談) 이진명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 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 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헤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 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 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糧 食을 이야기하리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 이 흘러오고. ---- 내 삶이 너무 멀리 있어, 아주 오래 전에 이 시를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어색한 토요일 저녁. 팔굼치는 까지고 목은 부어있고 몸과 마음이 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