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35

로르까와 함께 5월 어느 오후

조심스럽게, 상냥한 오월의 바람이 녹색 이파리 끝에 닿자, 이미 무성해진 아카시아 잎들이 놀라며, 스치는 바람에게 지금 칠월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반팔 차림의 행인은 영 어색하고 고민스러운 땀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며, 건조한 거리를 배회하고, 길가의 주점은 테이블을 밖으로 꺼내며, 다가올 어지러운 마음의 밤을 준비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2년 5월 어느 날, 그 누구도 듣지 않고 말만 했다. 말하는 위안이 지구를 뒤덮었다. 아스팔트 아래 아카시아 나무 뿌리가 바람에 이야기를 건네었지만, 땅 위와 아래는 서로 교통이 금지되었고, 학자들은 그것을 모더니티로 담론화시켰다. (이제서야 로르카의 시가 읽히다니... 1996년도에 산 시집인데..) 연 가 내 입맞..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꿈꾸며, 삭히며... - 심보선의 시집

나이가 들자, 철이 들자, 결혼 생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집은 내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먼 바다로 흘러들었다. 한동안 육지 생활만 했다. 거친 흙바람 사이로, 붕붕 거리는 검은 자동차들 사이로, 수직성의 공학적 규율로 세워진 빌딩들 사이로, 거대한 거짓말로 세워진 정치적 일상 속에서 시는 없었고 시집은 죽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여름이 왔다, 갔다. 외로움이 낙엽이 되고 흙이 되고, 몇 해의 시간이 지나자 사랑이 되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다. 먼 바다로 나갔던 시집은 지친 기색도 없이 이름 모를 바다 해변가로 밀려들었고 그제서야 나는 육지 생활에서 한 숨 돌릴 수 있는 무모함을 가지게 되었다. 시집을 샀다, 놓았다, 펼쳤다. 심보선은 2011년의 대세다. 몇 년이 지난 그의 시집을 서가에서 ..

오징어뼈, 에우제니오 몬탈레

출근길에 시집 한 권을 챙겨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 시집을 읽는 건 너무 낯설어서, 꺼내지도 못했다. 이는 사무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시집을 읽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로만 했다. 어쩌면 모든 시는 위기의식으로 만들어지듯, 모든 시 읽기는 현대적 공간에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시를 읽는 나는 물신적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21세기 현대적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 같았다. 한 때 내 모든 것이었던 시는 이제 시 읽기조차도 어색해진 상황이 되었으니, … 그런 내가 들고 나온 시집은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오징어뼈’였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의 시는 번득이는 슬픈 유머와 깊은 통찰, 그리고 나와 너, 자연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서..

저주받은 성, 파블로 네루다.

저주받은 城 파블로 네루다 지금 (추원훈 옮김) 내가 걷고 있는 동안 보도블럭은 내 다리를 두들겨 패고 있고, 별들의 찬란한 빛은 내 눈을 부숴뜨리고 있다. 창백한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 자욱을 남기고 비틀거리며 가는 마차에서 밀알이 떨어지듯 갑작스레 내게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오오 누구도 결코 챙겨 놓지 않은 길 잃은 생각들, 말이 내뱉어졌다면, 느낌은 내부에 남아있는 법. 여물지 않은 이삭, 악마는 그것을 공간에서 발견할 테지, 나는 망가진 눈으로 그걸 찾으려 들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리라. 나는 망가진 눈을 하고 끝없는 길을 쉬임없이 간다… … 왜 생각의 길을, 왜 헛된 삶의 길을? 바이올린이 부서지면 음악이 죽어 버리듯 내가 손을 움직이지 못할 때면 내 노래도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내 가슴 깊은 ..

청담

청담(淸談) 이진명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 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 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헤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 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 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糧 食을 이야기하리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 이 흘러오고. ---- 내 삶이 너무 멀리 있어, 아주 오래 전에 이 시를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어색한 토요일 저녁. 팔굼치는 까지고 목은 부어있고 몸과 마음이 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