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11

아무도 아닌, 황정은

아무도 아닌 황정은, 문학동네, 2016년 읽으면서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세상은 소설가 황정은이 그리는 세상보다 더 끔찍하지 않은가. 언젠가 김서령의 소설집을 이야기하면서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다 죽는다며 불평을 했다. 황정은의 이 소설집이 그런 식은 아니지만, 김서령의 소설들보다 더 끔찍하고 어둡다는 기분이 드는 건 황정은 특유의 문장 때문이리라(아니면 저 변하지 않는 세상 때문일지도). 무미건조하고 애정이 없는 문체(문장), 툭툭 던지듯이 서술되지만, 그 밑으로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숨어 흘러간다. 그러나 그 간절함은 오래된 지하수처럼 무겁고 차가우며 얼음장 같은 냉기와 함께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그 안타까운 간절함마저 이야기 속에서 얼어 독자의 발 앞에 떨어진..

비현실적인

점심을 간단하게 햄버거로 처리하고 도로를 걸었다. 작은 분수와 가로등에 달라붙은 채 갓 핀 꽃을 보여주고 있는 화분들을 보면서 참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시간 길가로 쏟아져 나왔다가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사람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지만, 그 웃음도 참 비현실적이었다. 모두, 우리들의 비극적 상황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모른 척할 것이고, 모른 척 하던 사람들이 다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될 것이다.이런 도시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많이 만날 수 있다. 이젠 성채만 남아 부서지는...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과거는 과거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변화를 거부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정지해있다. 그들은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후예들 ..

현실과 꿈

블로그에 작은 글 하나 써서 올릴 틈도 없는, 하루하루가 지난다. 낮엔 잠시 비가 왔고 우산을 챙겨나온 걸 다행스러워 했으며, 저녁엔 비가 그쳤고 손에 든 우산이 거추장스러웠다. 내 과거는 다행스러웠고 내 현재는 거추장스럽다. 집에 와서 페이스북에 한 줄 메모를 남겼다. * *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을 현실로 만든다는 건 ... ... 반대로 현실을 꿈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현실을 꿈으로 만들겠다. ... ... 거참, 힘든 일이다. * * 십수 년전부터 선배들을 따라 간 호텔 바를 얼마 전에도 갔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와인을 마셨다. 한창 와인 마실 때가 그립다. 그 땐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세상이 엉망이 되었다. 이젠 술을 마시기도 힘든 시절이 되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글, 그림), 길찾기 짧지만 강렬하다. 어떤 만화가 우리를 흔드는 힘은 형편없어지는 요즘 소설들보다 낫다. 최규석의 만화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진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메시지를 가지는 만화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둘리에 대한 비관적 해석이 불편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이 만화가 우리 모습의 반영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최규석의 초기 단편들로 엮여진 이 만화책은 어떤 젊은 작가의 등장을 알리는 선언이며, 만화가 현실에 대해, 우리의 진짜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그는 네이버에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추천한다. '송곳'이다. http://comic...

유행하는 인문학 담론, 그리고 일상에서의 실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다행스러워 할 줄 그 땐 몰랐다. 막상 직장 생활을 해보니, 이 자본주의라는 것이 정말 공포스러운 괴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능동태를 이야기한다거나 미켈란젤로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한지, 심지어 갤러리에 가서 작품을 보고 옆에 서 있는 작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저 세상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혹은 우리가 바라는 바 변화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랏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농부는 곡식이라도 생산해 보탬이 되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학자들은 말만 앞 ..

'철학함'에 대한 생각 하나

몇 개의 글을 쓰다 ... 프린트한 종이 더미 사이에 넣어버렸다. 혼자 쓰는 글이라는 게 마감 같은 게 있으리 없고, 돈벌이도 아닌 탓에, 쓰다만 몇 개의 글, 쓰다만 몇 개의 소설은 계속 짊어진 채 하루하루 살고 있는 셈이다. 오늘은 사무실에 칼 마르크스의 (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을 가지고 왔다. 어제 잠 들기 전에 서두와 역자 후기를 읽었고, 한동안 가방 속에 머물게 될 것이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을 읽다가 '철학자가 처한 현실'과 그것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관계 등에 대해 생각했고, 칼 마르크스의 까지 이어진 것이다. 작년 말 헤겔의 서문을 다시 읽었고, 뭐랄까,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할까, ... 그런 기분을 느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개념적 파악을 위해 정치적 현실을 논리화해 버렸다고 비..

사이방가르드 -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이광석

사이방가르드 -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이광석 지음 안그라픽스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라는 책 제목과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이 땅의 고민들을 반영하고 담아내려는 사이버 시대의 아방가르드적 행동주의의 흐름과 예술, 미디어 저항과 실천의 다양한 작업들에 주목한다. 책에서 소개되는 아방가르드 예술군의 사회 참여 방식을 보면서, 독자 여러분들은 현실의 야만에 반응하는 나름의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기 바란다. - 14쪽 작년 모 잡지의 원고 청탁으로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미술 분야의 일을 간간히 하지만, 최신 정보와는 다소 동떨어진 일상을 살아가는 탓에 이런 류의 책을 소개받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은 신선했다. 문장과 구성 방식, 그리고 소개되는 예술가들마..

전태일 평전, 조영래

전태일 평전 - 조영래 지음/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전태일 평전 조영래(지음), 아름다운전태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태일 평전을 읽었던 십 수년 전, 그 시절이. 그 때나 지금이나 첨예한 현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문제적 텍스트.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읽혀졌으나, 우리의 현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아마 누군가(들)는 나아졌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예전의 그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그대로 남아있고, 변하는 세월 속에 그 문제에서 파생된 새로운 문제들은 끊임없이 생겨나, 나아졌다고 이야기할 때의 그 ‘나아지다’라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 계속 되묻게 되는 2010년의 가을. 실은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도 필요 없고,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사상 따위도 필요 없다. 그런 건 그 다음의 문제다. 그냥 인..

논리와 현실, 그리고 우리 삶의 불투명성.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 나이를 떠올리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자 아팠다. "상이한 두 개의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국영은행 시절 나는 국가의 돈을 가지고 화폐와 대출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최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았어요. 첫째, 이 정책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둘째, 이 정책은 기업과 노동을 위해서도 유익할까? 그리고 세 번째 순위에 가서야 이 정책이 은행에도 유익할 것인가를 따졌습니다. 사적 자본을 위해 일할 때에는 우선 순위가 전도되었어요. 이 정책이 은행에 유익할까에 대한 질문이 우선이었지요." - 에드가 모스트(동독 출신의 경제학자), 자서전 '자본을 위해 봉사한 50년' 중에서 인용...

몰락을 향해가는 타인들

집중해서 뭔가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집중은 되지 않고 마음만 어수선하다. 어제 아침 기사를 보니, "당신없인 살 자신없다"며 기러기 아빠인 중년 남성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혼자 아이와 아내를 그리워했던 아빠는,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까지도 이젠 멀어졌다고 생각한 아내와의 이혼을 거부하다가 끝내 이혼하고 자살을 택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한국에서 오래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어느 미국인은, 한국에 살면서 '행복하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살았던 수 십 년 간 한국은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부,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도리어 더 불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