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중앙집권의 비밀 -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을 읽고

지하련 2010. 3. 26. 10:17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 10점
이중텐 지음, 심규호 옮김/에버리치홀딩스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이중톈 지음, 심규호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완독한 지 벌써 2달이 지났다. 이제서야 읽었음을 알리는 이 짤막한 글을 쓰는 이유로는, 첫째 책을 읽으면서 노트하던 독서습관이 장소를 옮겨가며 책만 읽은 형태로 바뀐 탓이며, 둘째 책을 읽을 수 있는 30분 이내의 시간들은 많았지만 글을 쓸 수 있는 4시간 이상의 시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잡다한 생각 끝에 길고 가느다란 상념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길고 고요한 시간에 대한 갈증이 쌓여가고 있다. 하지만 너무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이 책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중앙집권을 이루고 왕권(정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어떤 제도와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것이 일반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쉽고 단단한 문장으로 핵심을 가려내고 있다. 여기서 핵심이라고 표현한 것은 정치사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지 못한 나에게 이 책은 무척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앎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의 제국을 만든 진시황을 폭력적인 군주로 낙인 찍히게 한 사건이다. 하지만 정치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물질적인 생산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입만 살아 사사건건 중앙의 정책에 간섭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들(학자들와 유생들)은 제국의 적이 아니었을까.

 

현재 정령(政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논쟁이 분분한 것은 사상이 통일되지 않고 학술이 지나치게 자유롭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들은 관방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민간에 떠도는 사상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조정의 제도를 비난하고 있다. 조정에서 정령을 반포하면 민간 사상에 근거하여 사사롭게 논박하기도 한다. 그들은 조정에 나오면 몰래 마음 속으로 비방하고, 조정에서 물러나면 길거리에서 아무 말이나 해댄다. 심지어 황상을 비난한 것으로 유명세를 얻는가 하면 다른 정견을 지닌 것을 명예로 여기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군왕의 위신과 명망이 실추되고, 민간에게 무리 지어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꾀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학(私學)을 금지시켜야만 근원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106)

 

이사(李斯)는 진시황에서 글을 올리면서 위와 같이 알렸다. 기원전 213년에 시작된 이 일은 몇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시황을 폭군의 대표로 만들어놓았지만. 정말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2010년의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결국 중국은 한 무제에 와서 사상의 통일을 꾀하게 되는데, 이는 그 사상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탁월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백가를 내치고 유가사상만을 존숭하자독존유술’(獨尊儒術)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악한 이를 금지시키는 법에서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을 금하게 하는 것이고, 다음은 말을 금하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그 일을 금하게 하는 것이다.” (‘한비자설의’(設疑))

 


한 무제가 단행한 사상의 통일(독존유술)은 중국 제국을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자유로운 사상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하여 세계를 고정화시킨 것도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말 이후의 한국 사회도 그러했다. 말하자면 고려와 조선은 국가관부터 개인의 세계관까지도 철저하게 다른 두 나라가 되었다.) 

 

어떤 이들에게 사상의 자유가 마치, ‘도시의 공기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식의 중세 말기 분위기를 연상시킬 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조용하고 바르게 운영되던 어떤 마을이나 나라를 소란스러운 난장판으로 만드는 어떤 배경으로 여겨질 것이다. (나는그  소란스러운 난장판에 어떤 규칙과 배려가 적용되었을 때의 미덕, 그것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는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정치인들은 그것에 대해 부정적임을 지난 대선에서 확실히 보여주었다.)


 

만주족이 세운 나라였던 청 말기, 외세에 의해 무너져가던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유학을 공부한 관리들과 유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한족이었다. 사상의 통일은 이 정도로 위력적이면서 위험한 것이다. 마치 서양의 중세가 천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중톈은 위태위태하던 제국이, 혹은 무능한 왕이 지배하던 시기에도 나라가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지방의 이름없는 관리의 성실함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다양한 관점에서 제국 시스템의 탄생, 유지/운영, 몰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현재 한국 정부나 정치권력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현재 정부나 여당의 생각과 정책이 참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기지만, 이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점은 확실해보인다.)


 

또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중국은 흔히 이야기하는 빨갱이국가였다.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엥겔스주의자들의 나라이며 마오의 나라였다. 그렇다면 빨갱이’, ‘좌파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왜 중국와의 거래나 대화는 용인하고 있는가가 너무 궁금해졌다. 마치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처럼. 이처럼 논리적 사고나 일관성 결여가 한국의 맨 위에서부터 저 밑 아래에까지 퍼져서 이젠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듯하다. 하물며 일반 대중은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예전에 사람들 앞에서 이집트미술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가 떠오른다. 서구의 영화나 책에서, 종종 옷을 거의 입지 않은 노예의 어깨에 화려한 장식을 한 의자가 올려져 있고 그 위에 파라오가 새롭게 건축 중인 피라미드 현장을 방문한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어김없이 그 옆에는 긴 채찍을 든 감독관이 있어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때리는.


 

하지만 이집트 피라미드 돌에 새겨진 채 몇 천 년을 견뎌온 한 문장은 우리는 놀라게 만든다. ‘즐거운 노동이 끝난 후에 맥주를 마시러 가자, 친구여’ … 실은 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피라미드 건축에 참가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며, 언제나 풍족한 삶을 구가하던 이들에게 이 노동은 고된 것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한 종류의 것임을 우리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신의 위계 질서가 정해져 있고 인간의 신분이 정해져 있으며, 신도 인간도 여기에 만족하여 살아간다면, 세상은 놀랍도록 평화롭고 즐거울 것이다. 마치 이집트처럼. 신분제 사회가 어렵고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쓸모 없는 지식만 쌓은 현대인들의 착각일 지도 모른다. 중국의 몇몇 황제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할 수 있었다. 실은 모험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으며 현재 상황에 만족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에 '불가능함'이 놓여있다거나 '신의 저주'나 '분노'가 숨어있다고 믿으며 정해진 대로 살아갔을 때의 편안함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우리들은 알고 있다. 마치 본능적으로. 그래서 새로운 질서를 외치고 변화와 모험을 외치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는 환영받았지만, 어느 시대에는 외면당하고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그렇다면 정해진 질서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긴 모든 이들이 안정된 공무원이 되려고 하고, 시골의 아낙부터 젊은 직장인, 심지어 초등학생부터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는 요즘, 과연 우리는 모험과 도전을 외칠 수 있을까? (이런 주저함 속에서 현재의 한국 정부와 정치권력이 깃들고 나이든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피켓을 들고 폭력적인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이중톈의 이 책은 중앙집권이나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정부나 사회를 포함하여 한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는가에 대해 풍부한 통찰을 줄 수 있다. 실은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흥미진진한 독서의 경험을 느끼게 해줄 유익한 책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