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폴 드 만 Paul de Man과 텍스트 Text

지하련 2011. 11. 1. 13:41


얼마 전 흥미로운 trackback이 달렸다. 나로선 무척 반갑고 흥미로운 일이다. 가끔 인문학적 배경을 두고 저널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지만, 글쎄, 학문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교수들이나 비평가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적 이슈에 대한 trackback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Trackback을 해주신 balbutier님께 감사를 표하며, 폴 드 만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인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인문학자들의 세계를 거칠게 이등분하자면, 텍스트중심주의자들과 컨텍스트중심주의자들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마치 마르크시즘 진영에서 보는 관념론자과 유물론자의 대비처럼). 한 쪽은 텍스트적 문제 속에 컨텍스트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으니, 텍스트 연구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텍스트도 컨텍스트의 일부이고, 컨텍스트의 반영물로서의 텍스트이니, 어쨌든 문제는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라고 주장한다. 20세기 후반 문학이론이나 인문학의 경향은 전자에 쏠려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텍스트중심주의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입장 - 컨텍스트중심주의자 - 에서 마틴 맥퀼런의 책을 읽고 리뷰했다.

이 리뷰는 전문적인 배경을 가지지 않은 나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쓴 글이었다. 폴 드 만의 입장이나 텍스트중심주의자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것과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다. 그 점에서 폴 드 만에 대한 한국의 전문 필자들의 태도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엔 후자의 입장에 선, 전형적인 컨텍스트중심주의자들인, 그래서 한미 FTA를 반대하고 중도 좌파이거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견해를 곧잘 표시하는 그들이 폴 드 만에 대해 우호적인 소개나 리뷰를 잡지나 온라인에 게재하는 모습을 보고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과 폴 드 만Paul de Man

그들이 어떤 연유로 테리 이글턴과 동시에 폴 드 만을 같이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턱이 없지만, 이건 그들의 지적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상황에 맞추어 그들의 사상적 입장이나 정치적 견해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닐까.

한 쪽은 현실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한 쪽은 텍스트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둘은 마주 보는 평행선 위에 있으며, 이 두 입장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수용하는 하나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놀랍도록 창조적인 인문학적 혁신이 될 것이다.

학문이란 일관된 태도의 문제

학자에게 진정성이란 하나의 태도를 얼마나 일관성 있게 가지고 가느냐에 있지 않을까? 일관된 주의주장만이 그들의 생명이고 진정성이 될 것이지만, 놀랍도록 한국에서 그런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이런 삐딱한 태도로 일관한 탓에 지금 나는 학문의 세계와는 멀리 떨어진 것같지만.
 
폴 드 만의 수용은 해체주의에 기반한 텍스트중심주의 문학 이론의 수용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이 수용이 가지는 정치적인 함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치적인 함의에 주목하는 글이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실은 그토록 많은 이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고, 소설의 죽음이니 작가의 죽음 이야기하였는데, 시간이 지난 후 그것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고 반성하는 사람 한 명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더 불행한 것은 아직까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조차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트렌디한 어떤 것이 된다. 학자들와 비평가들의 손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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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 - 폴 드 만의 인생과 사상. 이창남, 웹진문지 (* 이 글은 '독서의 알레고리'를 번역한 이창남 선생의 폴 드 만 소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