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지하련 2009. 10. 18. 16:32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 8점
마틴 맥퀄런 지음, 이창남 옮김/앨피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있다. 아예 책 전체가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주체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치 암호처럼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끝까지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든다. 몇몇 독자는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로만 병렬적으로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독자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악명을 떨치니 말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못지 않다. 아도르노는 ‘글쓰기’를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실천으로 여겼다. 불문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독일어로 글을 쓴 아도르노에 빠진 것도 독특하기 그지 없는 아도르노식 글쓰기 탓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유인지, 뭔가 있어보이면서도, 실제로도 그 뭔가가 있는 저자나 책을 만나기가 이렇게나 어려울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 전반의 주요한 관심사가 ‘글쓰기’가 된 듯 하다. 심지어 한국의 몇몇 저자들 -김영민, 김진석 등 - 도 매우 이상한 글쓰기를 보여준 적 있었다. (난 아직도 그 때의 호들갑스러운 지식인들의 반응을 기억한다. 정말 대단한 글쓰기였다면, 지금쯤 모든 이들이 그렇게 글 쓰고, 그 글쓰기에 대한 메타 비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실은 그들이 그런 이상한 글쓰기에 빠지게 된 것도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나쁜 영향 때문이다.

확실히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이후 ‘언어’은 이 세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려면, 무조건 걸고 넘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언어로 된 구조물, 그 중에서 가장 만만하면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고 여겨지는 문학작품들이 그 대표가 되었고, 일군의 저자들은 문학을 닮은 글쓰기를 ‘탈구성적 글쓰기’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속은 텅 비어있으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이들과 여기에 빠지는 순진한 이들 때문이지. (굳이 ‘지적 사기’를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얼마 전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책을 읽었다.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든 탓인지, 폴 드 만이라는 이름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영문학을 전공한 이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폴 드 만 해대서, 매우 대단한 학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위시하여 정치적이며 반-자본주의(반-신자유주의)에 대한 풍부한 글과 책을 소개하는 이들도 폴 드 만, 폴 드 만 해대는 모습에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할 정도의 학자구나 하고 여겼다.

웃긴 짓들이다. 내가 읽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폴 드 만은 비-현실적이며, 또한 심각할 정도로 이론-중심적이서, 현실세계가 어떻게 되던, 나는 책 속에 빠져서 책 속에서만 살아갈래 하는 이론가처럼 읽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이 뭐길래 폴 드 만 같이 대단한 학자를 비난하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 속에 인용된 테리 이글턴의 입장을 좀 길게 인용해볼까 한다.


이글턴은 ‘굶주림, 혁명, 축구 게임 그리고 스페인산 백포도주를 탈구성적 입장에서 아직 결정할 수 없는 텍스트로 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고통스러운 실제 사건(굶주림, 혁명)과 경박한 텍스트를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탈구성의 부조리함을 개진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는 현실의 위계(굶주림, 혁명, 축구 게임 그리고 스페인산 백포도주)를 텍스트의 동질성으로 와해시키는 탈구성적 요구의 위험을 강조하고 있다. 열거된 것 가운데 백포도주는 다소 품위가 떨어지고, 굶주림보다는 덜 현실적이며 덜 중요하다. 마치 스페인산 포도주와 같은 서구의 퇴폐주의적인 물건의 존재가 아프리카 기근의 원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의미는 탈구성적 입장의 수사학적 관심이 기근이라는 야만적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굶주림이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정치학의 충분한 기초다. 하지만 단지 그렇기만 하다면 문제는 쉬울 것이다.
사실상 이글턴은 여기서 드 만의 저작이 개진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166쪽~167쪽)


그런데 테리 이글턴의 이 지적은 자신의 확고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입장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가능한 지적이며 비평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국내에 너무 많아 보이는 건 개인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폴 드 만은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며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평하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회계약론’은 약속에 관한 생각을, 그것이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그것을 약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그렇게 추측을 통해서 약속은 유일하게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약속’과 관계되는 언어의 형상적 차원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선 의미를 닫고(로고스 중심주의), 그 자체의 오독의 (오)해독을 중첩시키며 그것을 제시하는 의미를 다시 무화한다. (탈구성) 이처럼 ‘사회계약론’같은 텍스트는 대립적인 제스처가 문법 영역에서의 무한히 열린 의미 생산과 충돌하며 생산되었다. 달리 말해서,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의 독서 가능성(단일하고 고정된 의미의 관점의 가능성)을 전제하나, 그러한 독서가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80쪽)




이렇듯 폴 드 만은 독서의 불가능성, 이론의 불가능성(저항)을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테리 이글턴의 폴 드 만이 가진 생각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특히 드 만의 비평은 문학 언어가 부단히 그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는 데 바쳐져 왔다. 실로 드 만은 그 과정에서 다름 아닌 문학의 ‘본질’ 자체를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던 것이다. 드 만이 올바로 인식하고 있듯이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불가피하게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literally) 글자 뜻 그대로(literal)라고 믿는 것은 실수이다. 철학, 법, 정치이론도 시와 마찬가지로 은유(metaphor)에 의거하고 있으며 똑같이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은유가 본질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고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로 바꾸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언어는 가장 강렬하게 설득력을 지니려 하는 바로 그 때에 자신의 허구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을 노출시키곤 한다. ‘문학’은 이런 애매모호함이 가장 뚜렷한 영역인데, 그 안에서 독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수사적인 의미 사이에 처하게 되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서 ‘읽을 수 없게’ 된 텍스트에 의해 끝없는 언어의 심연 속으로 어지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은연 중에 자신이 수사적이라는 사실을, 즉 문학작품이 말하는 바가 그 행하는 바와 다르고, 문학작품적 구조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그 본성이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식의 글들도 똑같이 수사적이고 애매한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속여넘긴다. 동료인 힐리스 밀러와 마찬 가지로 드 만에게 있어서 문학은 비평가에 의해 해체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문학이 스스로 해체하는 것임을 밝혀줄 수 있으며 더구나 바로 이 해체작용을 문학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창작과비평사, 179쪽)



폴 드 만이 관심 기울인 것은 현실이 아닌 텍스트였고, 텍스트 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폴 드 만의 저서를 사서 읽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폴 드 만을 읽을 시간에, 폴 드 만이 열 올렸던 저자들의 오래된 저서를 다시 읽는 것이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폴 드 만에 대한 충분한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