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 마틴 맥퀄런 지음, 이창남 옮김/앨피 |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있다. 아예 책 전체가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주체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치 암호처럼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끝까지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든다. 몇몇 독자는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로만 병렬적으로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독자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악명을 떨치니 말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못지 않다. 아도르노는 ‘글쓰기’를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실천으로 여겼다. 불문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독일어로 글을 쓴 아도르노에 빠진 것도 독특하기 그지 없는 아도르노식 글쓰기 탓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유인지, 뭔가 있어보이면서도, 실제로도 그 뭔가가 있는 저자나 책을 만나기가 이렇게나 어려울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 전반의 주요한 관심사가 ‘글쓰기’가 된 듯 하다. 심지어 한국의 몇몇 저자들 -김영민, 김진석 등 - 도 매우 이상한 글쓰기를 보여준 적 있었다. (난 아직도 그 때의 호들갑스러운 지식인들의 반응을 기억한다. 정말 대단한 글쓰기였다면, 지금쯤 모든 이들이 그렇게 글 쓰고, 그 글쓰기에 대한 메타 비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실은 그들이 그런 이상한 글쓰기에 빠지게 된 것도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나쁜 영향 때문이다.
확실히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이후 ‘언어’은 이 세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려면, 무조건 걸고 넘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언어로 된 구조물, 그 중에서 가장 만만하면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고 여겨지는 문학작품들이 그 대표가 되었고, 일군의 저자들은 문학을 닮은 글쓰기를 ‘탈구성적 글쓰기’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속은 텅 비어있으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이들과 여기에 빠지는 순진한 이들 때문이지. (굳이 ‘지적 사기’를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얼마 전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책을 읽었다.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든 탓인지, 폴 드 만이라는 이름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영문학을 전공한 이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폴 드 만 해대서, 매우 대단한 학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위시하여 정치적이며 반-자본주의(반-신자유주의)에 대한 풍부한 글과 책을 소개하는 이들도 폴 드 만, 폴 드 만 해대는 모습에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할 정도의 학자구나 하고 여겼다.
웃긴 짓들이다. 내가 읽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폴 드 만은 비-현실적이며, 또한 심각할 정도로 이론-중심적이서, 현실세계가 어떻게 되던, 나는 책 속에 빠져서 책 속에서만 살아갈래 하는 이론가처럼 읽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이 뭐길래 폴 드 만 같이 대단한 학자를 비난하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 속에 인용된 테리 이글턴의 입장을 좀 길게 인용해볼까 한다.
사실상 이글턴은 여기서 드 만의 저작이 개진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166쪽~167쪽)
그런데 테리 이글턴의 이 지적은 자신의 확고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입장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가능한 지적이며 비평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국내에 너무 많아 보이는 건 개인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폴 드 만은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며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평하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약속’과 관계되는 언어의 형상적 차원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선 의미를 닫고(로고스 중심주의), 그 자체의 오독의 (오)해독을 중첩시키며 그것을 제시하는 의미를 다시 무화한다. (탈구성) 이처럼 ‘사회계약론’같은 텍스트는 대립적인 제스처가 문법 영역에서의 무한히 열린 의미 생산과 충돌하며 생산되었다. 달리 말해서,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의 독서 가능성(단일하고 고정된 의미의 관점의 가능성)을 전제하나, 그러한 독서가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80쪽)
이렇듯 폴 드 만은 독서의 불가능성, 이론의 불가능성(저항)을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테리 이글턴의 폴 드 만이 가진 생각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창작과비평사, 179쪽)
폴 드 만이 관심 기울인 것은 현실이 아닌 텍스트였고, 텍스트 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폴 드 만의 저서를 사서 읽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폴 드 만을 읽을 시간에, 폴 드 만이 열 올렸던 저자들의 오래된 저서를 다시 읽는 것이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폴 드 만에 대한 충분한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