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몇 달 전에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글의 일부다. 그 사이 세상은 꽤 변했고 ... 하지만 쓴 글이니.. 끝까지 다 쓰고 올릴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서두부터 올리고 글이 씌여지는 대로 업데이트를 할 생각이다.
2011년을 되돌아보며
01. 풍경으로서의 정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한미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난 뒤, 그 누구도 그 행위에 대한 반성 표명 없이 스스로 일신하겠다며, 박근혜 의원을 중심으로 헤쳐모여 하고 있다. ‘비대위’라는 상징적 기구를 통해 일신의 모양새를 만든 후, 친이계와 현 MB정부를 압박하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지만, 이건 그저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소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드러낼 뿐이며, 보는 이들을 향해 풍경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보는 이들의 자리로 와서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강요한다. 그건 즉물적 세계다. 인상주의적 세계다. 공감적 세계가 아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거리, 어느 비오는 날', 1876~1877
캔버스에 유채, 212.2*276.2cm, 시카고 미술관
지난 몇 년 동안 MB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세계가 바로 이런 즉물적 풍경이었고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 리그 속에선 평범한 농부 옷차림으로 논두렁 사잇길로 자전거를 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타자의 세계를 넘어서 미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해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계였고, 대통령 당선자체부터가 아주 우연적인, 심지어 한국 현대사에선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던 셈이다. 왜냐면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사라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건 마치 질병 같은 것이다. 순결한 어떤 풍경 속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였다. 대통령이 되면 말을 아끼고 지시만 내려야 되는데, ‘대통령 못해 겠먹다’고 하지 않나, 자신을 지지해준 정당의 국회의원들로부터 탄핵소추를 받는가 하면, 심지어 진보언론으로부터 무시당하던 대통령이었다. 낯선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다.
정치적 리더십의 세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했고, 평범한 우리들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넓은 호수 위에 한 점 기름이 그 세력을 넓혀가는 꼴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호수에 속했던 자들과 그 호수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들은 이제 머지 않아 순결하기만 했던 특권적 한국 정치의 호수에 아무나 발을 담글 수 있겠구나 하는 염려가 퍼져나갔고 결국 기름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최초가 탄핵이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고 그가 사라진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너, 나, 우리』를 통해, 여성의 육체를 높이 평가하며 여성성이란 정체 불명의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타자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 이 세상 밖으로 창조해내는 신비라고 말한다. 이렇게 여성성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체계이며,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되는 가치가 된다.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배타 지향적 세계라면 반-풍경으로서의 정치는 이타 지향적 세계가 된다. 실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권이 바뀌고 어느 곳에서는 열광적 지지가 이어지고 여러 저널에서의 여론 조사의 지지율이 계속 높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도구 밖에 없는 세계에선 그 도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비교 대상, 즉 옳은 것이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비교대상이 생기더라도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겐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와도 같이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풍경에 익숙해진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이 짧은 글은 작년 한 해를 뒤돌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혹자에게 이 글 서두의 정치 이야기가 낯설지 모르겠지만, 최근 읽은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의 『권력의 지배(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 』은 나로 하여금 바람직한 의미의 권력Power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은 나는 권력 지향적이지 않다(그래서 혹자들이 보기엔 둔해 보이고 비현실적이거나 마냥 희생적인 케릭터로 보이게 할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반-권력적이다. 수직적인 질서를 싫어하고 수평적이길 원한다. 사각형 회의 테이블을 싫어하고 원형 테이블을 좋아한다. 하지만 전략 실행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구조 속에선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들조차도 논리적 접근, 혹은 옭은 제안이 거절되기 일쑤인 현실 세계에서 권력이란 옳고 바람직한 실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권력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당연히 ‘인간 중심적’(Human-Centered)여야 한다. 실행 중심적이 아니라!
2011년을 되돌아보며
01. 풍경으로서의 정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한미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난 뒤, 그 누구도 그 행위에 대한 반성 표명 없이 스스로 일신하겠다며, 박근혜 의원을 중심으로 헤쳐모여 하고 있다. ‘비대위’라는 상징적 기구를 통해 일신의 모양새를 만든 후, 친이계와 현 MB정부를 압박하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지만, 이건 그저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소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드러낼 뿐이며, 보는 이들을 향해 풍경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보는 이들의 자리로 와서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강요한다. 그건 즉물적 세계다. 인상주의적 세계다. 공감적 세계가 아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거리, 어느 비오는 날', 1876~1877
캔버스에 유채, 212.2*276.2cm, 시카고 미술관
지난 몇 년 동안 MB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세계가 바로 이런 즉물적 풍경이었고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 리그 속에선 평범한 농부 옷차림으로 논두렁 사잇길로 자전거를 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타자의 세계를 넘어서 미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해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계였고, 대통령 당선자체부터가 아주 우연적인, 심지어 한국 현대사에선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던 셈이다. 왜냐면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사라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건 마치 질병 같은 것이다. 순결한 어떤 풍경 속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였다. 대통령이 되면 말을 아끼고 지시만 내려야 되는데, ‘대통령 못해 겠먹다’고 하지 않나, 자신을 지지해준 정당의 국회의원들로부터 탄핵소추를 받는가 하면, 심지어 진보언론으로부터 무시당하던 대통령이었다. 낯선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다.
정치적 리더십의 세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했고, 평범한 우리들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넓은 호수 위에 한 점 기름이 그 세력을 넓혀가는 꼴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호수에 속했던 자들과 그 호수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들은 이제 머지 않아 순결하기만 했던 특권적 한국 정치의 호수에 아무나 발을 담글 수 있겠구나 하는 염려가 퍼져나갔고 결국 기름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최초가 탄핵이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고 그가 사라진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너, 나, 우리』를 통해, 여성의 육체를 높이 평가하며 여성성이란 정체 불명의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타자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 이 세상 밖으로 창조해내는 신비라고 말한다. 이렇게 여성성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체계이며,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되는 가치가 된다.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배타 지향적 세계라면 반-풍경으로서의 정치는 이타 지향적 세계가 된다. 실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권이 바뀌고 어느 곳에서는 열광적 지지가 이어지고 여러 저널에서의 여론 조사의 지지율이 계속 높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도구 밖에 없는 세계에선 그 도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비교 대상, 즉 옳은 것이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비교대상이 생기더라도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겐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와도 같이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풍경에 익숙해진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이 짧은 글은 작년 한 해를 뒤돌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혹자에게 이 글 서두의 정치 이야기가 낯설지 모르겠지만, 최근 읽은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의 『권력의 지배(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 』은 나로 하여금 바람직한 의미의 권력Power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은 나는 권력 지향적이지 않다(그래서 혹자들이 보기엔 둔해 보이고 비현실적이거나 마냥 희생적인 케릭터로 보이게 할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반-권력적이다. 수직적인 질서를 싫어하고 수평적이길 원한다. 사각형 회의 테이블을 싫어하고 원형 테이블을 좋아한다. 하지만 전략 실행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구조 속에선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들조차도 논리적 접근, 혹은 옭은 제안이 거절되기 일쑤인 현실 세계에서 권력이란 옳고 바람직한 실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권력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당연히 ‘인간 중심적’(Human-Centered)여야 한다. 실행 중심적이 아니라!
* 작품 설명.
인류의 지적 구조물을 버리고 순수하게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인 세계만 옮겨야 한다는 확신이 서자,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이 작품의 대상이 되고, 또한 그 대상의 외면만으로도 어떤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란 그 중요성을 점차 상실해간다. 인상주의의 세계다. 인상주의에서는 익명성이 부각되고 도시가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의 공간이 되며 삶의 순간성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카유보트는 도시 산책자로 거리를 거닐면서 거리의 한 순간을 캔버스에 옮긴다. 그리고 사각의 캔버스로 옮겨진 그 풍경에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지적인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채 그저 물질성만을 강조하고. 이제 외부 세계는 나와 무관한 어떤 세계이며, 나도 그 세계 속에서 익명의 어떤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포디즘적 세계에서 한 사람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움직이듯, 인상주의적 세계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독특함이나 개성, 독자적 세계관을 상실하고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파시즘에서는 과학 기술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상주의적 세계의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풍경으로서의 정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일반 서민의 풍경이 바로 인상주의적 세계가 될 것이다.
인류의 지적 구조물을 버리고 순수하게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인 세계만 옮겨야 한다는 확신이 서자,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이 작품의 대상이 되고, 또한 그 대상의 외면만으로도 어떤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란 그 중요성을 점차 상실해간다. 인상주의의 세계다. 인상주의에서는 익명성이 부각되고 도시가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의 공간이 되며 삶의 순간성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카유보트는 도시 산책자로 거리를 거닐면서 거리의 한 순간을 캔버스에 옮긴다. 그리고 사각의 캔버스로 옮겨진 그 풍경에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지적인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채 그저 물질성만을 강조하고. 이제 외부 세계는 나와 무관한 어떤 세계이며, 나도 그 세계 속에서 익명의 어떤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포디즘적 세계에서 한 사람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움직이듯, 인상주의적 세계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독특함이나 개성, 독자적 세계관을 상실하고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파시즘에서는 과학 기술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상주의적 세계의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풍경으로서의 정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일반 서민의 풍경이 바로 인상주의적 세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