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2003년에 대하여

지하련 2004. 1. 2. 11:21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처음으로 내 인생이 그렇게 평탄한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날 아프게 했던 이들만큼 나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순간 무디어진 내 얼굴을 떠올렸다.

먼 허공을 보면서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것. 그것은 눈 앞에 있는 어떤 것도 응시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면서 회피이며 외면이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며 알면서 이미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기의 반복, 혹은 행동의 반복이 끊임없는 절망의 반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되어버린 오래된 성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 성에 살던 사람들이 사막으로 변해가는 지역을 버리고 딴 곳으로 갔으리라 추측하겠지만, 아마 역사가들은 누군가가 침입하였고 그 때 한 순간에 다 죽임을 당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문명의 단절이란 이렇게 생겨난다. 한 마을, 한 부족, 한 나라를 몰살시킨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한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학살? 아우슈비츠 이후로 서정시가 없다는 말은 얼마 되지도 않는 인류 역사 속에서마저도 유약한 지식인의 하소연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 특히 전장에서 죽는다는 것은 고대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가 틀리다. 칼과 방패를 들고 싸운다는 것은 여기저기 잘려진 머리가 뒹굴고 찢어진 배 밖으로 내장들이 튀어나온 모습을 보면서, 또는 그 내장을 움켜잡고 쓰러져 죽어가는 이의 모습을 보면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그런 이에게 한 번 더 칼을 휘두르겠지. 즉 '나는 누군가를 죽인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전에서는 양상이 틀리다. 전투기 조종사가 자신이 몇 명을 죽였는지 알 턱이 없다. 가까이서 총을 쏘는 경우에는 틀리겠지만, 대부분 어디선가 날라온 총알에 죽는다. 어디선가 말이다.

생명이 존엄하다는 건 평화 시에만 적용되는 가치이다. 그것은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위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미국에게 있어 이라크 인들의 생명은 존엄하지 않다. 가진 자에게 못 가진 자의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이라크인들에게 있어서도 미국 군인의 생명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못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을 시기하고 배척하며 그러면서 부러워한다. 우습게도 적과 닮아가는 것이다.

이제 생명은 존엄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게 되는 것이며 세계를 움직이는 진리란 없으며 세계는 무의미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지? 내가 철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유포자들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하루하루는 무의미와 싸우는 날들의 연속이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그래도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철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유포자들’이 그러한 세계관을 체험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어딘가 낯설어 보이고 새로워 보이는 이유 때문에 유포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살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다.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현재보다 조금 줄어들 것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확실히 늘어날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분명 늘어날 것이며 예상치 못한 범죄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왜 그럴까 라고 반문하지 말고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린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까닭없음이란 인과율의 부정을 의미한다. 즉 필연적인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며 내가 여기 있는 건 그저 우연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소설은 현대적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도망가고 싶은 세계의 반영이다. 그래서 퇴행적이며 도피적이고 현실의 아픔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허위와 기만에 호소하는 소설이 되는 셈이다. 소설이 필연적인 어떤 것을 반영한다는 건 옛날 말이다. 필연적인 것이 어디에 있다고 필연적인 것을 반영한다는 말인가. 그래도 필연적인 것을 반영해야 소설가 직함을 달아주는 시스템을 보면 아직 현대 소설로 오기에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그래서 ‘한국 문학에 노벨상은 멀었다’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가끔 아주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빽빽하게 비좁은 지하철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일제히, 동시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게 된다면 세상은 좀더 편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곤 한다. 즉 어느 순간 사람들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먼저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배우게 되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어지게 된 이유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켓을 들고 여대 앞에 서서 헤어진 여자 친구를 부르는 남자의 사연에 감동 받는 것이리라. 추측컨대 그 여대생은 일순간 ‘나쁜 년’이 되었을 것이다. (잔인한) 스토킹이란 그렇게 낭만스럽게 시작되는 것이다.(* 난 대중들이 생각하듯이 그 피켓을 든 행동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종종 학교 다닐 때 선생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았는가를 떠올리게 되면 나보다는 그 교실 속에서 같이 공부를 했던 많은 아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알튀세르라는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가치관이나 사회 통념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수되고 유입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랑의 완성이거나 개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적 비극의 한 단면을 만들어낸다. 즉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방편이며 인간 종족 유지를 위한 한 제도일 뿐이다. 가문, 또는 가족의 유지란 전통적으로 포장된 인간 종족 유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래서 ‘제 꿈은 현모양처예요’라고 하는 이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아마 그녀는 나이 마흔 정도 되어 남편 회사 보내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난 다음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끝내고 난 다음 오전 11시쯤, 아파트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오전 햇살 속에서 남편이 읽다가 만 신문을 펼쳐 보다가 문득, ‘내 인생은 뭐지’라고 묻는 순간 끝없는 우울증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몇 명은 그렇게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아줌마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공부 못 하는 아이에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을 하게 되며 남편에게 ‘내가 못 살아, 내가 못 살아’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줌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가정중심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어 공고화된다.

난 사교육 병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왜냐면 아줌마들을 모아 놓으면 어쩔 수 없이 사교육 시스템이 형성되고 유지, 발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회사에서 내몰리기 시작하는 아빠들까지도 여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기러기 아빠는 이 동참을 사회적 흐름이 되었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표지이다.

현대 경영 이론서를 읽다 보면 ‘이것이 진짜 자본주의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기적’이라는 단어가 적당한데, 그 이유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처럼 직원이 하나의 부품이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창조적 부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기업의 이상과 개인의 이상을 일치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 ‘사내대학’이나 ‘사내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한다),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관리 시스템을 노조에서도 가동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리고 수익 창출에 실패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이는 노조에서 한 개인을 왕따시키는 시스템과 유사한 것이다. (*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 발벗고 나서서 청년실업을 해소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더구나 그 시스템 속의 개인은 자신의 꿈과 이상이 자신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실은 다 조작되고 주입된 것인데. 영화 ‘메트릭스’가 실제로는 몇 백년 전 영국 경험론 철학의 대중 문화적 반영이지만, 새삼스럽게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가 보기엔 무척 재미있는 포스트모던적 짜집기(패스티쉬)에 불과해 보이지만 말이다. (* 솔직히 나라면 매트릭스를 없애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미친 짓을 왜 하지? 차라리 매트릭스 시스템을 보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나을 것같은데 말이다.)

베버의 ‘철창 속의 새’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왜냐면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이 도망칠 곳은 없다. 도망칠 곳이 없을 때 개인은 무엇을 하게 될까. 도망치지 않고 그 철창과 싸울까? 진정한 현대 예술은 이 세계와 정면 승부를 벌이는 양식이다. 내가 대중문화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에는 여기에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현실 속의 삶을 일깨워서 그것과 싸우도록 만들지도 못하면서 심지어는 그 현실이 아름답다고까지 말하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 양식을 매너리즘이나 로마 후기 양식과 비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즉 이들 양식은 끊임없이 도피적 환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소외된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건 비극적이다. (* 마르크스는 아직 호소력이 있다.) 더구나 돈을 제대로 벌려면 아무 것도 모르는 대중들의 허위와 기만에 호소하면 된다는 건 더욱 비극적이다. 이 정도 되면 돈이 눈에 보인다. (*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보일 뿐이다)

소설가 김채원이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하루 착하게 살 결심을 한다’고 적었다. 이 글을 읽고 참 감동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 소박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아주 소박하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소박적 생각은 중세적 세계 속에서나 어울리는 것이다. 조만간 중세가 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 전에 대학살이 일어나겠지만. 생각이 많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기형도는 극장에서 그냥 죽어버렸고 김중식은 ‘시 왜 써?’라고 반문한다고 한다. 랭보가 사업을 한 것이나 카프카가 ‘내 원고 다 태워’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된다. ‘고도가 오겠지, 올 거야. 좀 더 기다리자구’하는 블라디미르공과 에스트라공만한 바보도 없는데, 그런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사회 시스템 속에서 바보가 된다는 것이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