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이데올로기와 탈이데올로기, 사에키 케이시

지하련 2004. 4. 1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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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탈이데올로기 - 이데올로기는 종말을 고했는가?
사에키 케이시 지음, 이은숙 옮김, 푸른숲






사람에 따라서는 이념이라는 성가신 존재는 없어도 좋은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개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빵을 먹고 산다. 빵만이 아니다. 빵 다음엔 의복, 의복 다음엔 텔레비전이나 세탁기다. 그 다음은 자동차, 다음은 텔레비전이나 세탁기다. 그 다음은 자동차, 다음은 퍼스컴이다. 이리하여 물건의 계열이 무한의 시계열을 만든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만이 현실이다. 이렇게 경제가, 또는 물질적인 성장주의가 우리 사회의 기본을 형성하고, 그것이 이제 아시아의 경제 붐이라는 풍선을 타고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런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으며, 이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점을 굳이 비판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기적이 출현한 듯 치켜세울 필요도 없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실은 누구나 이 사실 앞에서 그것을 비판할 수도, 칭찬할 수도 없다. 요컨대 평가할 말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초유의 전지구적인 규모에서 전개되는 '경제' 앞에서 잠시 멈춰서서 어리둥절해 하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이 혼돈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이념이 없으면 사실을 평가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 머리말에서

몇 년 만에 다시 읽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이 먼저 정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무척 좋은 책이다. 그만큼 알기 쉽게 씌어졌고 그만큼 잘 정리되어 있다. 사에키 케이시는 이 책에서 '근대의 종말'이나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같은 여러 가지 버전의 '종말 담론'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노력하며 이것이 유럽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특히 후쿠야마에 대해선

'역사의 종말'이라는 명제는 헤겔을 답습한 것이다. 따라서 후쿠야마는 이 책에서 거의 3분의 2는 헤겔주의자로서, 나머지 3분의 1은 니체주의자로 변신한다. 그것이 이 책을 양분하고 있다.
- p.116

그래서 후쿠야마를 그 근본부터 비판하려는 작업은 유럽 근대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임을 지적하며 그런 이유로 후쿠야마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를 비판하는 좌파 지식인들 대부분 기본 가정으로 유럽 근대 이데올로기를 깔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유용한 책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유럽 근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20세기를 지배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 이데올로기가 가진 성격을 정리하고 있다. 매우 짧고 작은 책이지만, 어느 두꺼운 책 못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정치 사상의 차원과 실제 현실 정치의 차원을 적절하게 연결하여 설명함으로써 따분하기 쉬운 학술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이 책도 지금은 구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한 번 구해서 읽어보길 바란다. 한 권으로 근대(modern)를 정리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