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째가 아니라, 3주째다. 인후염에 걸린 지. 선천적으로 목 부위가 약해 가을에서 겨울 넘어갈 쯤, 매해 목감기에 걸렸다. 몇 번은, 그 때마다 다른 여자친구가, 서울 변두리에 살던 나에게 약을 사다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십 수년 전이니, 나도 나이가 든 건가. 아니면 그냥 세월이 흐른 건가.
해마다 마음이 건조해지고 아침해가 방 안 깊숙이 들어오지 못할 때, 목 안이 약간이라도 불편하면, 유자차를 마시고 목에 수건을 감고 자곤 한다. 인후염에 걸리기라도 하면, 매우 심하게 앓아눕기 때문이다. 그런데 3주 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유자차를 마시고 물을 하루에 몇 리터를 마시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아직 앓아눕진 않았지만(필사적으로 앓아눕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면 간경화가 일어난다는 감기 약까지 먹었으니), 이번 인후염을 길고 느리게, 하루, 이틀, 사흘, ... 그렇게 3주 넘게 내 목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불편한 목을 따라, 마음도, 무릎도, 팔꿈치도, 발등도, 사랑도 불편해졌다.
아직까지 인후염을 사라지지 않았고 봄은 오는 듯 하더니, 지난 겨울, 건조한 추위의 흔적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사랑하는 그대여, 바쁘고 쓸쓸한 봄이 될 것같구나.
사무실에서 나와 집에 오면 7시 30분. 저녁을 먹고 아이와 잠시 놀다 보면 금세 9시, 10시가 된다. 그제서야 뭔가 읽고 메모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빈둥거리다 잠자리에 든다. 계절 사이의 잠은 으레 거칠고 딱딱한 표면을 소유하고 있다. 잠은 언어를 잃어버렸고 사랑은 추억으로만 남아 사라지고 있었다. 가끔 자다가 한 쪽 팔을 올려 머리 위, 저 너머가 갖다놓는다. 그러면 몸 속으로 사랑이 들어오는 느낌이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착각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러게, 내 삶 전체가 착각이었으면, 내 지나간 사랑이 거짓말이었으면, 그녀에게 했던 고백이 허위였으면.
해가 뜨고 달이 뜨지만, 그 해가 그 해이고, 그 달이 그 달이다. 변화란 없고 오직 정지만 있을 뿐이다. 해마다 봄이 오듯, 인생의 수레바퀴는 죽음을 향한다. 말로였던가, 야스퍼스였던가, '오직 죽어가는 나만 있을 뿐'이라고 했던 이가. 그래,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눈에 띌 새도 없는, 죽을 병에 걸렸다. 어차피 위로와 위안은 보잘 것 없는 가식보다 못하고, 사랑은 허위와 허상으로 세워진 유리성과도 같았다. 하긴 그 유리성마저도 지키지 못했지.
퇴근길에 문득 하늘을 보니, 어두워진 푸른 빛깔 사이로 초생달이 보였다. 초.생.달. 사춘기 시절 이후 일상에선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단어다. 그렇게 초.생.달.이 떠있었다.
오늘, 여의도공원. 아메리카노 커피 하나 들고 나와 오전 회의를 떠올렸다. 나는 금방 지쳤다. 그리고 모든 사항들이 협의 사항이 되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런 일들이 나에게로 왔다. 다시 협의를 하고 결정을 할 것이다. 원래 내 일이었고, 내 일이 아닌 것도 내 일이 되는 팔자를 타고 났다. 정말 내 일을 하고 싶어 잠시 회사와 회사 사이에 내 몸을 위치시켰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내일도 종일 바쁠 것이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봄 햇살 아래에서 잠시 내 처지를 잊을 것이다.
가끔 비즈니스 미팅이 있을 때나 나오던 여의도를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는데, 금융회사를 다니는 듯한 이들의 천편일률적인 복장은 나에게 꽤 불편스러워 보인다. 어두운 색의 깔끔한 정장, 자켓 깃엔 회사의 로고 배지를 달고 머리엔 젤을 발라 뒤로 넘긴... 금융이라는 게 실물 경제와는 관련없고 실물 경제의 원활한 유통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젠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너무 커져(거품이 잔뜩 끼어) 실물 경제마저 위축시키는 시대가 되었건만, ... ... 우리는 알면서도 그저 휩쓸려 갈 뿐이다. 아니, 대다수는 모르겠구나.
지난 주말에 황지우와 천상병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차마 시집은 읽지 못하겠더라. 천상병 시인은 이제 없고 황지우는 노교수가 되었으니, ... ... 그나저나 나는 언제 긴 글 한 편 써보나. 하긴 글 쓸 자신마저도 이젠 사라지고 있으니... 모든 게 지나간 사랑보다도 못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