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

지하련 2019. 6. 23. 17:29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eable Feast

어니스트 헤밍웨이(지음), 주순애(옮김), 이숲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너무 유명한 나머지, 시간이 지날수록 소홀히 대하게 되는 소설가가 아닐까. 너무 이른 나이 -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 에 <<노인과 바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게 되고, 성숙하지 못한 정신으로 조각난 이해만을 가진 채,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들은 나이가 듬에 따라 잊혀져 간다. 대체로 고전이라고 알려진 것들 대부분은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 잠시 우리 곁을 머물다가 사라진다.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현대 영미 문학사에서도 헤밍웨이의 소설들은 길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만큼 뛰어난 작가들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전후 문학의 특징이 아닐까. 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멀리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대학을 다녔던 그 시절, 헤밍웨이는 거의 읽히지 않았고,  나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후기 모더니즘(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일본 소설에 꽂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펼쳐 든 헤밍웨이에 나는 그냥 빨려 들고 만다. 작년 초, <<헤밍웨이의 말>>라는 인터뷰집을 읽으며 헤밍웨이를 떠올렸고, 이 계기로 찾아 읽기 시작한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진가를 알기에 충분함을 넘어서 탁월함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었다. 그 정도로 밀도가 높고 흥미진진했다. 


이 책은 1957년 가을에서 1960년 봄 사이에 헤밍웨이가 자신의 젊은 시절인 1921년에서 1926년까지의 파리 생활을 회고하며 쓴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362쪽)


더 놀라운 것은 헤밍웨이의 기억력이거나 그의 표현력. 삼십 여년이 지난 어느 날,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머물고 경험했던 파리 생활을 회고하는데, 마치 어제 있었던 일마냥 표현하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그가 숨 쉬고 느끼고 경험했던 파리, 그 자체일 것이다. 


가을이 저물어 가던 어느날, 어김없이 고약한 날씨가 찾아왔다. 밤이면 언제 비가 들이칠지 몰라 창문을 꼭 닫고 자야했다. 찬 바람은 콩트르 에스카르프 광장 Pl. de la Contre Escarpe의 가로수 잎들을 세차게 날려 버렸다. 잎들이 비에 흠뻑 젖어 바닥에 뒹굴고, 빗줄기가 바람에 날려 버스 종점에 서 있는 커다란 녹색 버서를 후려쳤다. 그럴 때면 카페 데자마퇴르 Cafe des Amateurs는 사람들로 붐볐고, 유리창은 실내의 후끈한 열기와 담배연기로 김이 뿌옇게 서렸다. 동네 술꾼들이 모여드는 이 지저분하고 허름한 카페는 잘 씻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와 시큼한 술 냄새에 절어있었다.  (9쪽)


거울 들어 처음으로 찬비가 내리면서 도시의 온갖 서글픔이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를 산책하며 바라봐도 이제는 높고 산뜻한 건물의 지붕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에 젖은 음울한 거리와 작은 상점들, 약초 가게, 문구점, 신문판매점, 조산원, 그리고 베를렌이 숨을 거둔 곳이며 내가 꼭대기 층에 방 하나를 빌려 작업실로 쓰고 있는 호텔의 굳게 닫힌 대문 뿐이었다. (11쪽) 


산문집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이 문장들은 1920년대 파리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이 파리에서 헤밍웨이는 아침부터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다듬어 소설을 창작했고 천천히 유명해져 갔다. 어쩌면 소설가 헤밍웨이를 만든 건 파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는 소설가가 되어갔다. 


겉장이 파란 공책 한 권, 연필 두 자루와 연필이, (주머니칼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대리석 상판 테이블, 코끝을 간질이는 커피 향, 이른 아침 카페 안팎을 쓸고 닦는 세제 냄새, 그리고 행운. 이것이 내게 필요한 전부였다. 나는 마로니에 열매와 토끼발을 행운의 부적으로 삼고 늘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토끼발의 털은 이미 오래전에 다 빠졌고 뼈와 힘줄은 닳아서 반질거렸다. 발톱은 주머니 안감에 자꾸 거치적거리면서 행운이 아직 거기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227쪽) 

(* 토끼발 장신구에 대해서는 https://namu.wiki/w/%ED%86%A0%EB%81%BC%EB%B0%9C)


매일매일 그는 파리의 어느 모퉁이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지금 파리 사람들은 헤밍웨이가 마음 놓고 카페에서 글을 쓰던 그 시절을 그리워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장편 소설을 써야 한다. 그러나 정제된 문장으로 소설을 완성하려고 애쓰다보니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장거리 달리기를 연습하듯이 우선 조금씩 조금씩 긴 글을 쓰는 훈련이 필요했다. (87쪽) 


이 책을 통해 젊었던 헤밍웨이가 어떻게 소설가로 성장해갔는가에 대한 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파리의,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자유스러운 평화와 함께. 


Ernest Hemingway (far right) in 1926 in Paris, outside the city’s famous Shakespeare and Company bookshop. He is pictured with three women, including Sylvia Beach (on his right), the shop’s founder. Photograph: Collection Lausat/Keyston-France/Cam

출처: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5/nov/20/hemingway-paris-memoir-no-1-france-following-terror-attacks-a-moveable-feast 




파리는 날마다 축제 - 10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