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미학연습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

지하련 2020. 5. 2. 14:58

마사 누스바움(Martha Craven Nussbaum, 1947 ~ )



마사 누스바움의 책이 이렇게 많이 번역되었는지 몰랐다. 그만큼 많이 읽힌다는 뜻일텐데, 나는 그동안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시적 정의>>를 도서관에서 빌려 조금 읽다가 대출 기간이 다 되어 반납한 것이 전부다. 오늘 서가를 정리하다가 프린트해놓은 논문 하나가 있어 블로그에 정리하여 올린다. 아래 논문을 통해 간단하게 마사 누스바움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스바움의 책 몇 권을 사서 읽어야겠다.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에 관한 수용적 검토, 윤철홍 교수(숭실대), <법철학 연구> 제 17권 제 2호, 한국법철학회, 2014년 

(PDF 주소: http://kalp.kr/bbs/board.php?bo_table=sub4_2&wr_id=449&page=2


* 두서없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적었다. 내가 읽은 논문은 위 주소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 19세기에 개념법학과 법실증주의가 유럽의 법학계를 지배하면서 '법에는 흠결이 없다'라는 법의 무오류성이 제창되었다. 

- 법학계의 주류인 법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온 대표적인 운동이 19세기말 소위 '자유법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법감정을 강조하면서 판결은 자동판매기의 판매물이 아니라는 사실, 즉 조문이라는 기계에 사실관계를 집어 넣고 톡톡 치면 판결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 이러한 법감정을 강조하는 자유법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러 법학운동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법과 문학'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문학에서의 법'의 문제와 '법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문제들을 심도있게 논구하였다. 

(논문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아직도 법실증주의가 대세인 듯 보인다)


- 재판 시 감정 개입에 대한 비판론 - 예컨대 캘리포니아주 배심 판결의 기준에 따르면 평결에서 배심원들은 "그 어떤 감정, 추측, 동정, 열정, 편견, 대중의 견해나 분위기에 절대 동요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즉 재판과정에서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훌륭한 배심원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감정을 완전하게 걸려내어 합리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결정내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훌륭한 배심원이 취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감정, 동정, 연민, 분노, 증오 혹은 이와 같은 어떤 것에도 좌우되어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기준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릴 경우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 <<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1995년) - 문학 특히 소설 속에 나타나는 문학적 상상력을 중심으로 재판관의 임무 내지 정의를 설명. 


- 인간의 삶에서 상상력이 없게 된다면 제정법만능주의나 형식주의에 빠져 기성품화 내지 박제된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의 제정이나 해석에 법적 상상력을 넘어선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없이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정의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 누스바움이 제안한 '시적 정의'도 기본적으로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공적인 삶의 적용에 이른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래에서 인용하는 바와 같이 '시적 정의'의 판단 기준이 필요다고 하였다. 


"나의 '시적 정의'라는 개념 속에 구축된 판단의 기준은 이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친밀하면서도 공평하며, 편견 없이 사랑하고, 특정한 집단이나 파벌의 지지자와는 달리 전체에 대해 그리고 전체를 위해 생각할 줄 알고, '공상' 속에서 개별 시민들의 내적 세계가 갖는 풍성함과 복잡함을 이해하고 있는 문학적 재판관은, 휘트먼의 시인과 같이, 풀잎사귀들 속에서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존엄 - 또한 성적 갈망과 개인적 자유의 보다 신비로운 이미지들까지도 - 을 본다." (<<시적정의>>, 251쪽 ~ 252쪽) 


- 누스바움이 말하는 '시적 정의'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희구적인 권선징악이라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마이클 샌델이 추구한 공동체주의나 아마티아 센이 주장한 인간 자유의 확장으로서 '실질적 자유'에 가까운 사회, 경제학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 누스바움은 휘트먼의 견해를 수용하여 문학가, 특히 시인을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라고 정의하였다. 문학가들의 작업을 지지하는 누스바움이 주로 비판한 것은 주류 개발 경제학이나 공공영역에서 규범적인 것으로 옹호되어온 '경제적 공리주의'이다. 그녀에 따르면 공리주의적 계산에 해당하는 것만 보려는 경제학적 사유는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식 가능한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그들의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과 같은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의미와 삶의 신비함과 복잡함을 알지 못한다. 특히 삶의 복잡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 누스바움에 따르면, 문학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우리 눈 앞에 데려다 놓는다고 한다. 문학은 인간 존재들의 상황과 내면세계를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이에 따라 독자는 이러한 문학서를 읽어나가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마치 나의 일처럼 감정 이입하게 되고, 그가 느끼는 행복, 기쁨, 고통, 공포, 두려움, 희망에 공감한다. 소설을 통해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 배제된 자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세상의 불의와 참상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귀족적 이상보다는 평등과 같은 민주적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문학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전복적인 힘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회에는 변화를 모색하는 문학을 사랑하는 정치인, 법률가, 시민이 많아야 할 것이다. 


- 누스바움에 따르면,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게 하고, 이러한 공감으로부터 얻은 경험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된다. 또한 소설은 사회와 환경의 변화무쌍한 특성이 어떻게 공유된 희망과 욕망의 실현에 관계를 맺는지를 알게 해준다. 따라서 소설은 훌륭한 정치학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넘어 타인과 사회, 세계를 인식하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는 정치적 존재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가 강자의 힘에 굴복해버린 시대에, 국민들이 문학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누스바움이 강조한 '독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문학의 내재적인 힘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독자의 층위인 것이다. 누스바움은 처음부터 문학 자체의 가능성이나 그 내재적 힘을 추적하지 않고, 철저하게 문학적 경험으로부터 형성될 독자의 '감정적 합리성', 즉 각각의 사람을 제각기 살아갈 삶이 있는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대도를 요청하는 데에 한정하고 있다. 


- 누스바움에 따르면, 문학적 상상력은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나은 기쁨이 없을 때, 최상의 것을 창조하는 것", 즉 "고귀하고 구현 가능한 경우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상의 것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지되길 희망하는 가운데서 인간의 가치가 증명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러한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를 잃게 될 것이다. 공상을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 특히 감정이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데, 이를 위한 여과장치로 애덤 스미스가 제안한 '분별 있는 관찰자'의 개념을 들고 있다. 여기서 '분별 있는 관찰자'는 자신이 목격한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염려하는 친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또한 그는 개인적인 안전과 행복에 관계된 감정을 갖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편향성을 갖지 않으며, 자기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으로 얻어진 정보를 사용하지만, 이 정보들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편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여관된 것들이다. '분별 있는 관찰자'라는 장치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주목하는 분노, 공포 등의 부분을 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사 누스바움을 근래에 보기 드문 문학 옹호론자였다. 20세기 후반 문학 내부에서는 문학의 쓸모없음이라든가 서사의 종말, 저자의 죽음 같은 걸 논의했는데, 그 때 미국의 법(철)학자들은 '법과 문학'을 논의하면서 문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의외였다. 인문학 내부에서도 학제간 논의가 필요함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마사 누스바움을 읽어야 할 이들은 법률가들이 아니라 문학가들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자신들의 종말을 노래한 비평가들이나 문학이론가들, 또는 문학이론 수입상들, 유학을 갔다와 자신의 학문적 입지를 자극적인 수입 이론으로 자리매김하려던 교수나 강사들 말이다. 요즘도 그럴까?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