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가

살아 있는 누군가 마음 속에서의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데미안 허스트

지하련 2021. 4. 10. 15:38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살아있는 누군가 마음 속에서의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라는 뭔가 심오한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글쎄다. 얼마나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을 지는 현대미술 전문가들의 손길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상당히 어려운 단어들로 포장해서 설명할 것이다. 가령 아래와 같이. 

 

1980년대 이후 현대미술은 신체에 대한 폭력성과 자기 분열을 보이는 일종의 '신경증적 리얼리즘neurotic realism'을 나타냈다고 말한다. 허스트의 개념미술은 그러한 증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 전영백, <<발상의 전환>>, 106쪽 

 

'신체에 대한 폭력성'이 다소 낯설지만,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 풀어보자면, 이렇다. (공부에 손 놓은지 한참이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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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철학(혹은 지성사)에 이야기하는 근대Modern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근대적 주체(자아)라든가 이에 기반한 원근법적 세계, 또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이해를. 

 

서양미술사에서 반-데카르트주의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미술 사조는 단연코 인상주의이다. 인상주의자들이 우리의 감각지식에 충실한 표현을 드러내면서 평면성에 몰두하면서, 그 이후 미술은 추상성을 향한 극적인 도전과 추구로 이어진다. 그 방향은 크게 표현으로, 형식으로 나누어지며, 이를 두고 추상표현주의와 추상형식주의로 구분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구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끝없이 흔들리는 어떤 마음(감정)-낭만주의적 경향-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부여잡아줄 어떤 질서-고전주의적 경향-이다. 19세기 후반의 반-데카르트주의는 20세기 초에 극적인 전환을 이루는데, 외부 현실 세계를 조망하면서 데카르트주의를 구현하던 미술의 흐름은 내부 의식 세계를 조망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심리학적인 자아를 탐구하게 된다. 20세기 초반 문학들이 보여준 의식의 흐름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우리 내부로 향하면서 그 속에서 어떤 흔들리지 않는 질서를 찾아 패턴화를 시키기 시작하며, 그 속에서 세잔의 작품들은 견고하고 고전적인 추상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내면에 대한 탐구는 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실존주의자들의 끝없는 의문 속에서 행동에 대한 탐구(잭슨 폴록)나 그것을 지우기(드 쿠닝에 대한 라우센버그의 작업 - '지워진 캔버스'), 자신을 가리기(앤디 워홀)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들어서는 자기 자신을 오브제로, 대상화시킨다. 오를랑 테크노노바디는 아예 성형수술과 접목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일종의 여정이다. 데카르트적 자아를 거부한 이래,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현대는 그 여정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신체의 폭력성은 자신의 신체를 오브제하고 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아 분열은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예술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낯설고 기괴한 느낌을 가지고 오기 마련이다. 신경증적 리얼리즘은 이런 예술 작품들이 가지는 일련의 양식적 특징을 모아 설명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적었지만, 막상 적고 보니, 내가 쓴 글이 더 어렵게 여겨질 것같다. 그러므로 내 글도 무시하시길.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니. 아래 작품이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있는 누군가 마음 속에서의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다. 1991년도 작품이며, 최초 전시부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 마디로 20세기말 미술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몇 되지 않는 작품들 중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 이후로 논란의 작품들을 연이어 선보였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테마이다. 앞에서 데카르트적 세계관(혹은 자아)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실은 그것은 철학의 관점에서 주목하는 지점일 뿐, 실제 서양미술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20세기 후반 예술가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지나, 나(혹은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 천착한다. 앤디 워홀은 서양미술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가 될 것이며, 현대 미술 작품들의 상당수는 Vanitas 작품들에 속할 것이다. 이 점에서 데미안 허스트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 작품도 삶의 허무함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Vanitas 작품인 셈이다. 

 

A Dead Shark Isn't Art, Stuckism International, 2003.

 

하지만 이런 작품을 어느 갤러리에 걸리기도 했다. 어쩌면 현대미술은 어떤 아이디어(뒤샹의 변기)로 시작해 무수한 아이디어들로 범람하다가 몰락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국 아이디어 싸움이 된 자본주의 전쟁터. 최근의 블럭체인 작품은 나로서도 상당히 황당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