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투명사회, 한병철

지하련 2021. 8. 28. 16:18

 

투명사회 Transparenzgesellschaft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년 



“그대가 자유를 사랑한다면 베일을 거두지 마라. 나의 얼굴은 사랑의 감옥이니까.”
- 레오나르도 다빈치 (151쪽에서 재인용) 




2012년말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인문(철학)책으로 그 목록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때로 지적 허영이 독자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도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이 책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이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후 <<피로사회>>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읽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베스트셀러’가 가지는 대중적이고 때로는 속물적이기까지 한 이미지와 달리 상당한 울림이 있었다. 그는 현대의 고질적인 문제 - 개인적 차원까지 내려온 성과주의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담론들의 폐해 - 를 매우 통찰력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포스트모던 철학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긍정성’과 (최근에 더욱 주목받고 논의가 되는) ‘능력주의’에 대한 것이다. <<피로사회>>를 읽은 후 한병철의 책 몇 권을 더 구입했다. 그 중 한 권이었던 <<투명사회>>를 얼마 전에 읽었다.

 

투명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투명성은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5쪽)

 

내가 ‘투명성’이라는 단어를 주목하게 된 것은 IMF 이후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다. IMF에서 강제하는 여러 가지 정책들은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금융 자본과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경제 정책과 기업 경영 방침들이 소개되고 적용되면서 강조된 단어가 바로 ‘투명성’이었으며, 그 당시 거의 시대적 명령 비슷하게 들리고 통용되었던 단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당시 한국은 ‘투명성’에 있어서는 상당히 낙후된 국가이기도 했으니.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정보로 전환된다. 오늘날처럼 비물질적인 생산 방식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증가가 곧 생산성의 증대와 가속화를 의미하게 된다. 반면 비밀스러운 것, 낯선 것, 다른 것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런 것들은 투명성의 이론으로 해체된다. (6쪽)

 

그리하여 투명사회의 일차적인 모습은 긍정사회Positivgesellschaft로 나타난다. (13쪽)

 

하지만 한병철은 이러한 투명성에의 요구가 우리를 얼마나 옥죄는가를 설명한다. 과도한 투명성에 대한 집착은 도리어 신뢰를 사라지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 요구와 집착은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것이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98쪽)

 

투명사회는 정확히 성과사회의 논리를 따른다. 성과 주체는 노동을 강제하고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 구조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경영자다. 하지만 지배구조의 소멸이 진정한 자유, 실제로 강제가 없는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인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99쪽)

 

한병철은 더 비관적인 주장을 이어 나간다.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공동의 관심을 좇거나 하나의 상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에고Ego의 집합(브랜드 커뮤니티)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Ansammlung가 생겨날 뿐이다. 그러한 무리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 즉 ‘우리’가 될 수 있는 집회Versammlung와 구별된다. (100쪽)

 

공동 이익을 위한 정치적 집회가 아니라 허상만을 쫓는 이합집산적인 모임들만 생길 뿐이다. 자유로 포장되어 있으니, 그것은 통제이며 감시사회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투명성은 도리어 우리들 자신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며 한병철은 염려한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놉티콘은 전체가 된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은 없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신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101쪽 ~ 102쪽)

 

책 후반부에 있는 <<무리 속에서 - 디지털의 풍경들>>이라는 글을 통해 한병철은 디지털과 투명성을 연결 지으며 현대 문명이 가지는 위기 상황을 계속 이야기한다. <<투명사회>>에서 논의된 내용들도 함께 논의되며 디지털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117쪽)

 

소비 가능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실재의 단순한 모상이며, 이미지의 특별한 의미론과 시학을 파괴한다. 이미지들은 소비되기 위해 길들여진다. 이미지 길들이기를 통해 이미지의 광기가 소멸한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진실을 잃어버린다. (153쪽)

 

투명사회에서는 사적 영역은 사라지고 공적 영역, 아니 공개된 투명한 영역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디지털 세계일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또다른 자아를 만든다.

 

디지털 매체는 나이도 운명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에서는 시간 자체가 얼어붙어 있다. 그것은 무시간적 매체다. 반면 아날로그 매체는 시간의 흐름에 시달린다. (156쪽)

 

최근 이야기되는 메타버스도 이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디지털 속에서 또다른 투명한 자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나르시시즘적이며 실제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자아일 수도 있다. 마치 인스타그램이 자신의 현실을 숨기기 위한 과시적 플랫폼으로 변해가듯이.

 

우울증은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은 것은 병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태도다. 나르시시즘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목소리의 반항 밖에는 듣지 못한다. 그러한 주체는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에게 세계는 자아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녹초가 되어, 자기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나르시시즘적으로 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소셜미디어는 나르시시즘적 매체다. (198쪽)

 

디지털 세계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디지털이 최초로 등장했을 때, 그 곳에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며 철없는 진보주의자들은 열광했지만, 그 전망은 무의미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온라인게임에서도 ‘현피’(현실 PvP(Player versus Player)의 약자)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절대로 현실(오프라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디지털 중심주의자들은 그것이 전부인 양 호도한다.

 

바르트에 따른 사진의 진실은 지시체와 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즉 실재하는 관련 대상에 묶여 있다는 점에 있다. 사진은 지시체의 발산인 것이다. 지시체에 대한 사랑과 신의가 사진의 특성을 이룬다. 사진은 허구나 조작의 공간이 아니라 진실의 공간이다. 바르트는 “지시체의 고집”을 이야기한다. 바르트의 <<밝은 방>>은 보이지 않는, 온실 속 어머니의 사진 주위를 맴돈다. 어머니는 바르트의 슬픔과 애도가 향하는 지시체 자체다. 어머니는 진실의 보호자다. (201쪽)

 

디지털 사진은 하이퍼포토그래피로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제시한다. 실재는 그 속에서 오직 인용 혹은 파편으로서만 현존한다. 실재에서 따온 다양한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적인 것과 뒤섞인다. 이로써 하이퍼포토그래피는 지시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지시적인 하이퍼리얼 공간을 창출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아무 것도 재현하지reprasentieren 않는다. 그것은 오직 제시할prasentieren 뿐이다. (202쪽)

 

한병철은 디지털 사진을 논의하면서 그것은 재현하지 않고 제시할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현실과 무관하다는 의미다. 실은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는 인터넷이 최초로 등장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대단히 많이 희석되었다. 이제 디지털은 우리 현실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여기에서 장 보드리야르를 떠올릴 지 모르겠지만, 한병철은 확실히 더 직접적으로 주장한다. 비관적인 전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우리 삶과 새로운 기술을 둘러싼 문제일 지도 모른다. 세상의 변화는 새로운 기술로 오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런 기술을 불러 들이는가. 19세기 이후 더욱 첨예화된 지점이기도 하다. 예술사, 또는 미학의 영역에서 속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문학 전반으로 확대된 문제이다. 이 점에서 한병철이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몰락, 망각 같은 단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손은 의미와 진리의 근원을 가리키는 “존재”의 매체로 나타난다. 손가락 끝으로만 작동하는 타자기는 우리를 “존재”에서 멀어지게 한다. 타자기는 글쓰기와 글의 본질을 가린다. “타자기는 인간에게서 손의 본질적 영역을 빼앗아간다. 사람들이 이러한 관계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이제 존재와 인간 본질의 관계에 어떤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타자기는 손의 위축증을, 글 쓰는 손의 몰락을, 존재의 망각을 초래한다. (166쪽)

 

책은 작고 얇지만, 내용은 상당히 무겁고 진지하다. 또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몇몇 지점은 너무 비관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종종 그에게서 완고하고 보수적인 고전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한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