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년 8월호

지하련 2021. 9. 22. 19:10

 

 

르몽드 디블로마티크, 2021년 8월호 
Le Monde Diplomatique

 

 

창간호부터 약 2년 가까이 매월 사서 읽다가 그만 두었다. 의외로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나라의 지엽적인 부분까지 다루고 있어, 차라리 다른 책이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또한 종이 종류나 두께(살짝 두꺼워 제대로 접히지 않는다), 그리고 사이즈도 애매해서 서가에 보관하기도 쉽지 않았다(반으로 접어 세우면 서가에 들어가지 않는 칸이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잡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돈 주고 사서 읽을 만한 거의 유일한 잡지에 가까워서, 종종 사서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른 책을 들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마틴 스콜세지의 헌사, “펠리니와 함께 시네마의 마법이 사라지다”라는 글도 읽어볼 겸해서 한 권 구입했다(딱히 감동적이지 않았지만). 판형도 바뀌었고 해서(아는 이는 이번에 바뀐 판형이 싫다며 온라인 정기구독만 했으니, 개인 취향이랄까).

 

참고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좌파 저널 세 개를 꼽으라면, <<Monthly Review>>, <<The Guardian>>, 그리고 <<Le Monde Diplomatique>>다(어디선가 읽은 주장이긴 하지만). 그만큼 좌파적 경향이 노골적이다.

 

기억해둘 만하거나 시사적이었던 문장들을 옮긴다. 그리고 내 의견도 덧붙인다. 지금 당장 내 인생과는 무관해보이는 것들이지만, 내 생각과 태도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해보이는 내용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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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화 예술은 조직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소외되고, 비하되면서 ‘콘텐츠’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축소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며, ‘형식’과 대비되고 비교되는 의미로만 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예술형식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이 미디어 회사를 인수하면서 점차 ‘콘텐츠’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콘텐츠’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고양이 동영상, 슈퍼볼 광고, 슈퍼히어로 시리즈, 드라마 에피소드 등 모든 영상 매체에 적용되는 비즈니스 용어가 됐다. 아마존이 오프라인 매장을 추월한 것처럼,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하기보다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관람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지면서 ‘콘텐츠’는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보다는 가정 내 시청(Home-viewing)과 연관되는 단어가 됐다. (8쪽)

 

봉준호 감독의 마틴 스콜세지 인용은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황소 Raging Bull>>은 정말 놀라운 영화였으니! 마틴 스콜세지는 페데리코 펠리니를 추억하면서 현재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화를 좋아하는(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글은 안타까운 고백 비슷할 것이다. 추억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아녜스 바르다, 존 카사베츠, 장 뤽 고다르 … 나도 한 때 영화광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기민련을 지탱하는 기본축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바로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신념, 친기업 정책, 콜이 주장한 예산 집행 원칙주의이다. (38쪽)

 

기민련은 독일기독교민주연합(CDU)의 약자로 현재 앙겔라 매르켈 총리가 속한 정당이다.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신념과 친기업 정책이 공존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사회주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레닌-스탈린의 사회주의가 있었고 모택동식 사회주의가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 정치적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지성적이며 맹목적인 사회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한국 전쟁 당시의 만행들과 그 이후 이어진 이승만 정부의 잔인한 보복, 정치적 만행 때문일 것이다.

 

지난 3월 27일 방영된 <알 권리>에서, 정치학자 세르게이 카라가노프는 이 같은 종류의 논쟁에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있다고 밝힌다. “명백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러시아인)는 진정한 유럽인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영원한 질문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유럽은 이제 우리 마음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유럽 문화를 끌어왔던 만큼, 우리도 톨스토이, 체호프, 차이코프스키 등을 통해 유럽 문화에 이바지한 바가 있습니다. 불행히도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던 유럽은 이제 그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롭게 떠오르는 다른 문화로 눈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48쪽)

 

러시아에서 바라보는 유럽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유럽인들이 바라보는 유럽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면 한국은? 일본은? 중국은? 전통은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있다. 도리어 미래에 더 있지 않을까.

 

피부색 ‘색조주의’가 계급을 가르는 라틴 아메리카. 
19세기에 독립한 라틴 아메리카는 식민지 시대 당시 지배적이었던 인종 계급제도를 공식적으로 철폐했다. 이제 더는 원주민 후손, 노예 후손, 지배자였던 유럽인 후손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민 제국 시대의 민족 분류 대신 오늘날에는 피부색으로 사회적 지위를 따지는 ‘색조주의’가 대륙을 지배하고 있다. (67쪽)

 

색조주의라, … 사람들은 어떻게든 지위에 민감할 수 밖에 없구나.

 

1994년, 르완다에서 투치족 약 80만명이 학살당할 때, 국제사회는 왜 그들을 구하러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70쪽)

 

하지만 이들 국가(아프리카의 국가들)에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가 확보된 지금도, 기자들이 외국에서 직접 취재를 감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외 상황에 대해서 아프리카 언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외 통신사(<AFP>, <AP>, <Reuters> 등)의 속보를 받아쓰고 있다. TV에서도 해외 뉴스는 말미에 프랑스TV(<TF1>, <France2>)의 논평이나 자료화면을 내보내는 수준에 그친다. 르완다 대학살 기간에 특히 침묵했던 민영 라디오는 지금도 르완다에 대해 철저히 함구한다. 따라 유일한 정보원은 <BBC>, <RFI>, <VOA> 등 주요 국가들의 방송국 채널 뿐이다. 물론 모든 정보가 왜곡 없이 전달되는지도 알 수 없다. (72쪽)

 

르완다는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1차 대전 이후 벨기에가 위임 통치를 하게 된다. 이 때 투치족과 후투족의 갈등의 씨앗이 싹튼다. 벨기에의 대리인 역할을 투치족 귀족들이 맡게 되고 후투족 지도자들은 배제된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이 일로 인해, 결국 후투족은 무거운 노역을 감당해야 했으며 교육 차별도 있었다. 그러다가 1962년 르완다 독립 때 후투족은 그동안 쌓여있던 분노와 불만으로 투치족을 공격한다. ‘투치족의 집들은 불탔고, 투치족 30만 명이 우간다로 도망쳐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난민이 됐다.’(83쪽) 이 갈등이 르완다 대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전은 부족 간의 싸움’이라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식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이 기사에선 이야기한다. 아프리카 대륙은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기 전에 지정학적 고려와 함께 아직도 19세기,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잔재로 싸우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만큼 19세기 유럽은 세계사적으로 악랄한 짓은 다 했다는 것을. 지금 선량한 척 합리적인 척 다하는 유럽 국가들이 말이다.

 

우리 언론의 신뢰도가 선진국 중 꼴찌에 가깝게 추락한 원인은 두 가지 신화때문이다. 우리 언론이 빠져 있는 신화 중 하나는 ‘자유의 신화’, 즉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신문 발행 부수의 신화’다. 
독극물에도 있는 표시, 유해 언론에는 없다.

우리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산재사고 희생자인 이선호 씨 관련 기사는 드물고, 한강변 의대생 사망사고에만 온통 기사가 쏟아진 것은 선정성 자체가 상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강한 절대 권력도 그들만큼 항상 마구 휘두르지는 않는다. … 헤드라인의 폭력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그것을 한 번쯤 연구해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작가의 말에서) 
- 이봉수, <한국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필요한 이유> 중에서

 

언론 문제는 심각하다. 이는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유독 심각한 것은 언론이 그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젠 한겨레나 경향마저도 믿을 수 없는 기사들을 버젓이 올리는 걸 보면서, 스스로 자신들이 가진 사소한 권력에 취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공중파 TV가 케이블 방송에 점유율을 빼앗기고 그 두 방송들이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미디어에 빼앗기는 걸 보면서, 한국 언론도 지각 변동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