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하련 2022. 4. 2. 11:12

 

엔트로피Entropy

제레미 리프킨(지음), 이창희(옮김), 세종연구원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제 1법칙), 엔트로피의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제 2법칙) - 50쪽

 

그리고 고전 경제학 이론대로 하다가는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165쪽

 

대학 때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으나, 이제서야 완독했다. 너무 뒤늦은 독서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그 시절엔 어떤 이유에선지 이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과학책도 아니고 철학책도 아니며 그렇다고 경제서적도 아니다. 그러나 물리학 법칙에서 시작해 고전물리학을 비난하고 근대 기계론자들-베이컨, 데카르트, 로크, 애덤 스미스 등-을 엄청 공격한다. 뉴턴 물리학을 부정하며(‘뉴턴 물리학은 운동하는 죽은 물질을 순수한 양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재생 가능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에너지 환경에서는 완전히 부적합한 패러다임이다’(289쪽)), 고전경제학으로 살아가면 다 몰락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 가면 전문화를 지향하는 교육도 버려야한다고 말한다. 상당히 과격한 책이다(그리고 상당히 거친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대 물리학에서 정의하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단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실은 ‘시간’이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시간은 규정할 수 없다), ‘시공간’이라는 단어가 맞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덩어리인 관계로,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고 구분 짓는 이것들도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이 정설이다. 우리가 종교철학 등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이 시간을 평면으로 바라본다는 설명이 현대물리학에서 증명한 셈이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유일하게 설명하는 법칙이 있다면, 흔히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알려진 ‘열역학 제 2법칙’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에너지도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운동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이 그의 전작 <<인터스텔라>>와 다른 이유는, 최대한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정의된 우주의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옮긴 영화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론(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반-엔트로피 법칙)을 영화에 적용한 오락영화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테넷>>이 별로였다. 영화 <<테넷>>이 화두로 삼은 법칙이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 - 이제 새로운 세계관이 떠오르고 있다. 이 세계관은 역사를 구성하는 틀로서의 기계론을 결국 대치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앞으로의 세계를 주도하는 틀로 자리잡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에 있어서 제 1법칙이라 주장했다. 아서 에딩턴(Arthur Edington)경은 이 법칙이 전 우주를 통틀어 최상의 형이상학적 법칙이라고 이야기했다.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제 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뜻이다. 제 2법칙(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것이다. (16쪽)

 

제레미 리프킨은 이 엔트로피 법칙을 화두로 근대 자본주의 문명과 철학, 즉 근대 기계론은 공격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20세기 후반의 반-근대주의, 반-기계론 흐름 속에서 리프킨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로크로 인해 현대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계몽시대 이래 개인의 생존 의미와 목표와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모두 물질적 이익의 추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도 기계론적 세계관에 도취되어 뉴턴 패러다임의 보편성을 반영하는 경제이론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에서 애덤 스미스는 움직이는 천체가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우리의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법칙을 따르면 경제는 성장한다. (42쪽)

 

그런데 왜 제레미 리프킨의 이 생각, 엔트로피 법칙에서 시작해 근대 기계론을 공격하는 아이디어가 왜 그 무수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이야기하는 책들이나 글에선 언급되지 않았을까. 학문의 분업화, 전문화의 폐해일까, 아니면 그냥 무식했던 자신을 숨기기 위해 외국 학문의 전파자로서만 머문 것일까. 하긴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리프킨의 아이디어는 실은 고전물리학에 대한 반발이며,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철학이 근대기계론,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근사한 책을 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이 점에서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들은 대부분 흥미진진하며 놀라운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제 2법칙은 이렇게 말한다. 에너지는 한 가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일정액의 벌금을 낸다.” 이 벌금은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다. 그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Entropy)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51쪽)

 

이 책의 초반부는 왜 엔트로피가 중요하며, 왜 근대 기계론이 잘못되었는가에 할애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한 방향, 즉 앞으로만 흘러간다. 이 방향은 또한 엔트로피 변화의 함수이기도 하다. 시간은 에너지가 집중된 형태에서 분산된 형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비춰준다. 엔트로피 과정을 역행시킬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67쪽)

 

우리는 한 사건과 그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을 통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지구 상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에너지가 소비되고 엔트로피 총량은 늘어난다. 세계가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는 뜻이다. 에딩턴 경의 말처럼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 (67쪽)

 

한정된 자원(에너지)를 가진 지구라는 폐쇄계 안에서 우리 인류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리프킨은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한 배경이 되는 이론이나 철학을 초반에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의 초판이 1980년도에 나왔다는 걸 떠올린다면, 이 책은 일종의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 당시의 독자들에겐 다소 황당한 어조로 읽혔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과학 책으로 읽혔을 지도.

 

지구라는 폐쇄계에 내재하는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완전히 구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생존과 다른 모든 생물종의 생존은 자연과 화해하고 생태계와 협동하며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 (90쪽)

 

산업화된 국가, 특히 미국은 엔트로피 분수령에 다가서고 있다. 엔트로피 분수령으로부터 400년이 지난 오늘날 전세계의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급격히 고갈되고 있다. 에너지 흐름의 각 단계마다 기술, 기구 등 변환자들이 더욱 복잡해지고, 집중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사회의 혼란이나 무질서가 증가했다. (153쪽)

 

그는 각 분야별로 우리 인류는 어떻게 자원을 낭비하며 엔트로피 법칙와 무관하게, 그것을 더욱 가속시켜 몰락을 재촉하는 활동을 가지고 있는가를 지적한다. 특히 미국의 사례를 자주 언급하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200년 전 에덤 스미스가 현대 경제이론의 주춧돌을 놓았던 것처럼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들은 전통적인 기계 패러다임을 따르는 경제 모델을 택하고 있다. 모든 경제 정책의 배후에는 뉴턴, 데카르트, 베이컨, 로크, 스미스의 망령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시스템을 이렇게 파악한다. 경제 시스템이란 기계적인 과정으로서 수요와 공급 기능이 시계추처럼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끊임없이 상호 조정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은 시장 구조를 부정하지만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처럼 전체적인 경제 환경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159쪽)

 

최근의 기후위기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한 다양한 규제 활동들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만, 이 책에 나왔을 무렵에는 주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열역학 제 2법칙을 이야기하면서 근대 기계론, 고전물리학, 고전경제학을 공격하고 그 사상으로 만들어진 근대 자본주의/사회주의를 비난하며, 근대적 삶의 형태들까지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이 상당히 도덕적이며 명상적이며 환경보호적으로 끝나는 것이 다소 맥 빠지긴 하지만(차라리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래도 나온 지 수십년이 지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상당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제레미 리프킨을 다시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비판도 많이 받는다.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을 잘못 이해하고 마치 절대적인 진리임을 가정하고 책이 서술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비판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가령, 물이 얼음으로 변할 때는 엔트로피는 감소한다. 특히 통계역학에서는 엔트로피는 확률에 의해 지배받는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여러 사례나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거나 단편적으로 인용되고 잘못된 이해된 채 서술되기도 한다(특히 일리야 프리고진의 이론). 

서강대학교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물론 현대사회는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이 책이 에너지와 자원의 무절제한 낭비를 일삼는 우리를 꾸짖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논리와 결론이 너무 빈약하고, 표현도 너무 선동적이다. (...)

여기서 말하는 열역학은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평형"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정립된 "평형 열역학"이다. 여기서는 평형의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외부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에너지"라고 부르고, 평형상태에서 "자발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변화의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서 "엔트로피"이라는 이론적인 개념을 도입한다. 

평형 열역학은 평형의 의미를 정의하는 "제0법칙"과 에너지를 정의하는 "제1법칙",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제2법칙", 그리고 엔트로피의 절대값을 정의하는 "제3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알려진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고,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표현은 정교한 논리로 짜여진 열역학 법칙을 매우 느슨하게 나타낸 서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열역학 법칙에서 말하는 '우주'는 "평형 상태에 있는 가장 큰 고립계"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로운 생명과 별의 탄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우주는 평형에 있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의 우주는 마침내 평형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열역학에서 말하는 "우주"가 된다. 그런 평형 상태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런 우주에서 다시 자발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가 또다른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우주"의 엔트포리는 처음보다 클 것임을 예언한 것이 바로 제2법칙이다. 

- 이덕환, <열열학을 벗어나 버린 엔트로피>,  <<서평문화>>, 2012년 12월

 

경상대 물리교육과 윤석주 교수는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과학자들이 알아낸 경험 법칙이며 확률적 내용을 담고 있다"며 경험적이고 확률적인 법칙에 대한 확신은 금물임을 강조했다. 또한 윤석주 교수는 리프킨이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잘못된 개념에 근거한 문명 비판과 미래 예측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푸념에 불과하다"며 "리프킨이 열역학 제2법칙을 맹신하면서도 다른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 윤석주 교수는 리프킨의 오류를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라고 해석하는 데서 생긴 것으로 본다. "여기서 무질서는 원자의 입장이 아니라 관찰자, 관리자의 입장으로 본 것이라며 향수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향수냄새를 없애거나 관리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향수 냄새가 퍼지는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이 무질서의 증가로 보인다. 하지만 향수 기체의 입장에서는 자유가 증가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윤석주 교수는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가 아닌 '자유의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 경대뉴스 https://www.gnu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7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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