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타타르인의 사막, 디노 부차티

지하련 2022. 8. 20. 19:52

 

타타르인의 사막 Il deserti dei Tartari 

디노 부차티Dino Buzzati(지음), 한리나(옮김), 문학동네 

 

 

 

"저야 알 도리가 없지요.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으리란 건 다들 압니다. 하지만 사령관이신 대령님이 배운 카드점에 따르면, 아직까지 타타르인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옛 부대에서 잔류한 타타르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고 말이지요." (69쪽)

 

 

사막 너머 타타르인들이 살고 있으며, 언젠가 우리를 침략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고 지키고 있는 이 요새는 그 예정된 전쟁을 막기 위한 최전선이다. 그 곳에 새로 부임한 신참 장교 조반니 드로고도 결국 그 전쟁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요새를 지키다가 떠나간 많은 군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날 기미 조차 보이지 않으며 요새 안에서는 전쟁과 무관한, 그러나 그 일어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군대와 군인. 그들은 일어나지 않은 전쟁을 위해 있는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작된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했다. 

 

그들은 침묵에 잠겼다. 바깥에서는 한 밤의 가을비 속에서 경비병들이 걷고 있었다. 테라스 위로 쏟아진 비가 처마를 따라 졸졸 흘러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75쪽) 

 

 

이렇게만 보면 소설은 상당히 치밀하고 스릴 넘칠 것같지만, 의외로 지루하고 담담하기만 하다. 그런 지루함 속에서 사소한 사건으로 인한 부조리함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금세 묻힌다. 실은 이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 설정, 인물들의 태도들 전체가 어떤 부조리함으로 채색되어 있기에 사건은 소설 위로 올라와 독자를 크게 자극하지 못한다. 

 

그들은 생각했다. 이즈음 도시엔 옅은 안개가 끼어 있고, 가로등은 희미한 노란 불빛을 비추겠지. 커플들은 어둠 속에서 한적한 거리를 배회하고, 오페라극장의 북적이는 유리문 앞에서는 마부들의 고함소리가, 부유한 저택의 어둑한 창문에서는 바이올린과 웃음 소리가 여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뒤섞여 나오겠지. 미로 같은 도시의 지붕들 속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은 환한 창문까지도, 청춘의 꿈과 아직 펼쳐지지 않은 모험들로 가득한 매력적인 도시 풍경이었다. (78쪽) 

 

가끔 등장하는 도시에서의 에피소드는 꿈 속의 꿈 같다. 조반니 드로고가 처음에는 가고 싶어했으나, 결국 가지 못한 곳, 더 이상 적응하기도 어려운 공간으로 변해갔다. 쉼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낯설고 부조리한 공간에서 빠르게 적응해 그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무서운 것이다. 소설에선 시간이 어떻게 흘러 가는지도 잘 느껴지지 않고 속도감도 전혀 없이 그 젊었던 장교 조반니 드로고는 어느새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린다. 

 

검은 대양 위의 희미한 섬들 같은 평야에서는 안개의 혀들이 만들어지며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 혀들 가운데 하나가 수수께끼 같은 물체를 감춘 채 정확히 보루 발밑까지 뻗어왔다. 공기는 습했고, 그로고의 어깨에 걸쳐진 망토는 힘없이 늘어져 무거웠다. (113쪽)

 

그렇게 사막 평원은 움직임이 없었다. 북쪽 안개도, 규정대로 반복되는 요새의 삶은 그대로 멈춰 있었고, 경비병들은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순찰을 돌면서 항상 똑같은 걸음을 반복했다. (246쪽) 

 

전체적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때때로 너무 현실적이다. 마치 서유럽 어딘가에 타타르인이 숨어 사는 사막이 있는 듯 싶다.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고 수십년 간 요새만 지키다가 병들어 그 곳으로 나오게 되는 드로고를 보면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소설의 후반부 전투의 조짐이 보이지만, 그 전투가 일어나는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우리와 함께 하는 드로고는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변호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은 독자들 대부분은 우리의 믿음이나 신념이라는 것이 어쩌면 저 사막 너머의 타타르인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아닐까 하며 자조할 것이다. 그건 결국 우리의 존재 의미를 어떻게든 찾기 위한 신기루는 아닐까.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실존주의적이며, 이 계열의 소설들 중에서 최고의 작품들 중 하나로 현재까지 지지받고 있다.  

 

낮의 회색 페이지와 밤의 검은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드로고와 오르티츠에게(어쩌면 다른 나이 든 장교들에게도) 더는 떠날 기회가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들어났다. 세월의 무게에 무관심한 북쪽 외인들은 마치 불사불멸의 존재들인 양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기나긴 계절들을 장난삼아 허비해도 그들에게는 그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요새에는 시간의 작업과 다다오는 최후의 순간에 무방비한 가련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247쪽) 

 

 

 

디노 부차티Dino Buzzati

 

소설 초판 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