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지하련 2022. 8. 27. 23:16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2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 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 얼마나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거지. 그의 다리에서 생생한 안내가 피어오른다. 그가 뿌린 흙 위에 나는 서있다. 이곳은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난다. 일어나기 전에 잠깐 동안 그는 앉아 있었는데, 동그랗게 어두워지는 자리였다. 내가 어지러워 돌처럼 흘러 나가는 자리. 소파에 앉아서 그는 흩어진 잔해를 본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집이라는 집은 없다. 고향이 없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지. 

 

 

이영주, 가끔 도서관에서 읽게 되는 문학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다른 이의 시는 잘 읽히지 않는데, 그녀의 시만큼은 유독 선명하게 나에게 읽혔다. 그냥 내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

 

최근 읽었던 국내 시인들로는 이병률, 유희경, 심보선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 중에서 유희경의 몇몇 시들은 참 좋았다. 이병률은 그의 산문이 시보다 더 좋았고, 심보선은 그의 산문집을 읽고 꽤 실망했다. 시인이 쓴 산문집도 아니고 사회학자가 쓴 산문집도 아니었다.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어정쩡했다고 할까. 그 실망이 컸던 탓인지 그의 시마저도 다시 읽게 되었다. 

 

이영주의 이 시집,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원했지만, 사랑의 흔적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번 기록이 마지막이길 기대했던 걸까. 지우기 위한 노력들이 묻어나온다. 하긴 나는 이 시인이 사랑했는지, 지금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이별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내 관심사도 아니다. 뒤늦은 나이에 사랑은 무슨. 레이몽 라디게가 아무리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고 20세기 초 강렬하게 호소했지만, 이 그런 사랑은 잊혀진 지 오래. 아무리 진실한 사랑이라도 자본이 아니라면 지탱되기 어려운 이 시기에(하긴 행동심리학에서 그 사랑의 근거를 찾아냈다. 마치 공작 수컷의 화려한 꼬리처럼), 사랑은 꿈꾼다는 건 사치다. 

 

이 시집은 사랑을 꿈꾸지 않는다. 사랑은 교묘하게 숨겨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사랑의 흔적들로 여겨지는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이영주의 공간은 낯설지만 딱딱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사뿐하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그 공간은 아늑하기 보다는 서늘하고 시니컬하다. 어느 정도의 포기로 자신을 보호하며 다른 존재들과의 거리 두기에 성공한다. 그래서 추억은 온전히 추억으로 보존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없는 사랑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 슬픔도 없고 그 상처도 없다. 이 시니컬함만 시를 지탱한다. 시의 상상력을 구성하고 읽는 이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로 인해 작은 위안을 얻는다. 결국 우리는 늘 혼자지만, 그래도 무언가 쌓여있는 시공간들 속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시집이 될 것이다.  

 

실은 이 시집보다 바로 전 시집 <<차가운 사탕들>>이 더 좋았다. 사랑을 하고 있었을 때였을까. 가끔 나도 사랑이란 걸 하고 싶다. 청춘의 사랑 말이다. 

 


집들이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은 모두 창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지붕에 걸려있는 구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나는 커피를 내리고 슬리퍼를 신겨주지만 우리 집에 오는 불꽃같은 사람들은 목조 주택을 태우고 구름 속에 연기처럼 섞여 들고 싶어한다. 우리 집 안에는 죽음보다 따뜻한 향기가 있어. 나는 재만 남은 슬리퍼를 신발장에 보관한다. 모든 것이 부스러져 밑으로 떨어진다. 구름 안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나는 창문을 열어둔다. 바닥에 앉아 귀를 대본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온 적이 없는데, 불에 타고 남은 흔적을 모으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창문 밖으로 퍼져나가는 재의 향기. 누군가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다. 왜 밖에 서 있을까. 나는 무형의 차를 데우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슬리퍼를 현관 앞에 놓아둔다. 

 

* *




친구를 만나러 



푸른 뱀처럼 간지러운 네가 왔다. 너는 너와 다른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너는 빛이라고 생각한 운동장에 놓여 있다. 한여름 밤이었는데 이상하게 너무 추웠지. 너는 바닥에 발을 묻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치마를 입고 왔어야 하는데, 이런 춤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너의 마음을 만지고 싶었다. 푸른 강아지처럼 새벽에 침을 흘리는 네가 왔다. 별이 폭발하는 순간을 본 적 있는가. 운동장에서 잘 보이지. 폭발하면서 조각을 남기는 순간 빛이 된다고 하네. 너는 폭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푸른 먼지처럼 왔다. 너무 만나려고 애쓰지 말자. 너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네를 탔다. 힘들어서 그네는 자꾸 밑으로 밑으로만 내려갔다. 바닥을 헤집고 들어가는 곤충이 잘 보여. 너는 깊은 땅속이 따뜻하다고 말한다. 너와 같은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빛이 떨어지는 마음은 같은 것이겠지. 나라고 부른다. 



 

시인 이영주

 

한국 작가들은 사진 구하기가 어렵다. 번역된 해외 작가들은 멋진 사진을 참 쉽게 구할 수 있는데. ... 그래서 예전 책 뒷표지는 어김없이 작가 사진으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길 가다 우연히 만나게 되면 아는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