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책그림책, 크빈트 부흐홀츠

지하련 2023. 5. 27. 09:13

 

 

책그림책 BuchBilderBuch

W.G.제발트, 밀란 쿤데라, 아모스 오즈, 미셸 투르니에, 세스 노터봄, 마르크 퍼티 등(지음), 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그림), 정희창(옮김), 민음사

 

 

크빈트 부흐홀츠(1957~, 독일)는 삽화가이다.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 그림들을 그려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만을 보면 참 좋은데, 이 책에서는 몇몇 글들은 참 좋지만 대부분의 글은 평이하다. 내 생각엔 번역 탓일 듯싶다. 모두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을 테니. 결국 두 세 번의 번역을 통해 한글로 옮겨왔을 테니, 최초의 글과 우리가 읽게 되는 글과의 거리는 상당할 것이다. 가령 오르한 파묵은 터키어로 글을 쓴 후 영어로 옮기거나 독일어로 옮겼을 것이고, 영어라면 다시 독일어로 옮긴 후 다시 한글로 왔을 테니, … 이 책을 통해 읽게 되는 오르한 파묵의 글은 파묵의 진짜 목소리가 아니다. 책의 편집이나 장정은 상당히 훌륭하며 번역자의 자세한 해설만으로도 상당히 신경 쓴 책이지만, 너무 많은 나라의,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글이 옮겨오는 와중에서 어떤 글은 원문이 가졌던 힘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올 당시만 해도 W.G.제발트와 미셸 투르니에가 살아 있었으며,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이었고, 제발트나 세스 노터봄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제발트가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고 8년 후에야 한국에서 그가 소개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알아야만 할 작가들 목록일 지도 모른다. 이 점에선 이 책은 한 번 눈 여겨 볼만 하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부흐홀츠의 작품들 대부분은 '책'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책그림책'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빛 속에서 언제나 정신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리를 누가 의미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인가? 단어는 저 높은 곳 중력의 세계에서 그 형태를 얻어는다고들 말한다. 단어들은 별들처럼 무겁고, 문장들은 산맥처럼 무거우며, 마침표와 콤마는 돈지갑 안의 동전들처럼 책장들을 무겁게 누른다고 한다.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책들은 더 두꺼워진다. 요지부동이다. 의미가 완전히 텅 빈 궁극의 책은 우리가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별들 - 이 별들은 너무 밀도가 높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골무 속에 그 전체가 다 들어갈 수 있다 - 처럼 그 자체 내에서 붕괴된다.

하지만 두 다리로 마치 파리처럼 천장에 달라붙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꼴을 보라.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는 점점 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닌가? 슬퍼하는 대신에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과 모양의 머리를 한 이 사나이가 우리의 고뇌에 대하여, 우리의 희망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 마르크 퍼티(Marc Petit, 프랑스의 작가)

 

 

크빈트 부흐홀츠의 세계적인 유명세와 달리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그림이 실린 몇 권의 동화책들이 번역되어 있다.

돌아온 검은 고양이 네로, 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 최성웅 , 전혜민 번역 ·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만화, 우반재 (* 하이덴라이히의 <<검은 고양이 네로>>는 너무 유명한 책인데, 이 책은 절판되었다. 이 책도 부흐홀츠의 그림과 함께 나왔다) 

 

아래는 부흐홀츠의 그림이다. 2014년도 작품이니, <<책그림책>>에는 실려있지 않다. 

 

Man, Reading,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