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작가 피정, 노시내

지하련 2023. 6. 26. 09:44

 

 

작가 피정 - 경계와 소란 속에 머물다

노시내(지음), 마티 

 

 

세상을 떠돌며 살다보니 지인은 많아도 친구는 적다. (230쪽)

 

 

이십대 무렵 잠시 유학을 생각한 적 있었다. 하지만 집에 말을 꺼내자 반대에 부딪혔다. 그냥 나가도 상관 없었을 텐데, 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에서야 그 때 무모하게 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마 나갔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께서도 그럴 기미가 보였으니, 반대를 하셨을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이런저런 일로 터키, 독일, 프랑스에 나갔을 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으니, 나는 어딜 가도 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렇다고 부러워하는 건 아니다. 가끔 지금 내 삶에 대한 사소한 불만이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뿐, 결국 내가 원하는 공간이란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자연 풍경이 좋은 작은 마을의 숨겨진 도서관의 햇살 잘 드는 창가 자리 같은 곳이니...  

 

노시내의 번역서는 여러 권 읽었으나, 노시내의 산문집은 처음이다. 한참 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여럿 읽긴 하였으나, 산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챙겨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쉽지 않다. 심지어 어떤 책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요즘 교보나 영풍 문고 같은 서점에 나갈 일도 없고 새 책도 책들을 읽다가 그 책에서 언급된 다른 책을 구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다 보니, 산문집을 고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가끔 도서관에서 골라 읽기는 하나, 신간은 특히 더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인연이 닿은 것이다. 우연히 들른 된 교보문고 강남점 진열대 위에 이 책이 있었고 '노시내'라는 이름에 바로 이 책을 샀으니까. <<작가 피정>>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고, 오래만에 책을 읽으며 저자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으니.

 

누군가의 일상이 잔잔하게 펼쳐진 글을 읽고 있으면, 자주 편안해짐을 느끼곤 한다.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와 다르다'는 기분이 아니라(젊었을 땐 나는 이것이 좋았다), 이젠 '다들 비슷하게 그렇게 늙어가는구나'하는 기분이 들 때, 안도감을 느낀다고 할까. 스가 아스코의 수필도 그렇고, 노시내의 글들도 그렇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 가든지 사람 사는 세상 풍경은 다 비슷해 보인달까. 말도 안 되는 저개발국가이거나 독재 국가, 무정부 국가 또는 전쟁 중인 국가가 아니라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서울도 취리히도 비슷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건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립톤 티백과 파키스탄 우유였다. 파키스탄에 나온 립톤티와 우유로 만든 밀크티가 너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리하는 방법은 이렇다. 립톤 티백에 붙은 종이 쪼가리는 미리 잘라버린다. 냄비에 우유와 물, 티백, 카다멈, 설탕을 잔 수에 맞추어 넣는다. 끓이는 동안 수증기가 날아가므로 액체를 10~20퍼센트 더 넉넉히 넣어야 나중에 차가 찻잔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유감스러운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우유는 끓이면 순식간에 넘치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지켜보다가 일단 한 번 끓으면 재빨리 약한 불로 줄여야 한다. 이걸 잘 저으면서 7~8분 더 끊인 다음 티백을 건져내고 잔에 따라 마시면 된다. (129쪽)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보니, 역시 파키스탄 립톤, 카다멈(향신료의 일종)은 한국에서 구할 수 있었다. 다만 파키스탄 우유는 구할 수 없었는데, 그냥 서울 우유로 해야 하나 아니면 유럽산 우유를 시켜야 하나. 그리고 냄비보다는 주전자가 좋을 듯하여 밀크티 전용으로 주전자도 하나 살까, 밀크티 전용 찻잔도 하나 ...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다른 생각으로 이어져 나갔다. 나는 외국에서 나가도 그 나라 식사에 바로 적응하는 스타일이다. 좀 덜 까다롭다고 해야 할까.

 

모스크바에서 남편과 함께 '비타민D 결핍'에 걸린 것도 재미 있었다. 티브이를 통해 햇살이 드는 겨울에 나가 웃통을 벗고 있는 모습을 보며, 왜 저럴까 했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다시 알게 되었다. 영하 10도 이하의, 우리로선 말도 안 되게 추운 날에 나가 햇살 아래 피부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역시 살아보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충중한 유럽의 겨울 날씨는 견뎌본 사람들만 그 어두운 기분을 알 것이다. 십 수년 전에 어느 늦겨울 남부 독일에서 몇 주 있는 동안, 어두침침하고 무거운 비가 내리는 날이 계속 이어질 때서야, 견디기 힘든 그 계절의 파워같은 걸 알았다고 할까. 매우 추운 날씨도 아니었지만, 해는 비치지 않고 비만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상당히 힘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취리히에서 보낸 사십 일은 일종의 '작가 피정(writer's retreat)의 기간이었다. 성당을 멀리한 지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서류상의 카톨릭신자일 뿐이지만, 여전히 피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고요한 곳으로 떠나야할 것같은 잔잔한 충동이 인다. 피세정념(避世靜念),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수도원에서 묵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이다.(14쪽)

 

이 책은 저자가 혼자 취리히에서 보낸 사십일에 대한 기록이다. 하루 하루가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사십일 동안 매일매일 쓴 건 아니겠지 하면서 읽어 나갔다. 나도 이렇게 기록해 볼까, 일기를 이렇게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역시 상당한 집요함 같은 게 있어야 가능하는 걸 알았다. 저자는 그 사십일 동안의 일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수시로 메모 하고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책을 내는 목적이 없었다면 굳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고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살았던 저자의 경험, 번역가로 언어과 연관된 여러 정보들로 인해 꽤 시사적이며 잡다해서 일상 생활을 넘어서 세상사의 여러 이야기까지 적고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심지어 숙소를 청소하러 온 이들과의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언어와 지역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리고 자주 언급되었던 파키스탄 정치 이야기나 러시아 - 우크라이나 이야기도 재미 있었다. 특히 국내에는 그저 코미디언 출신의 대통령으로 알려진 젤렌스키가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 풍자 드라마 이야기는 젤린스키가 우크라이나 정치에 대해 깊은 관심을 이전부터 가지고 왔음을 알게 해주었다. (* '국민의 일꾼'으로 나무위키에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독일식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인용해본다. 아무 생각없이 듣고 읽었던 이름들이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다. 

 

1885년에 세워진 이 저택의 주인은 카를 퓌르흐테고트 그로프라는 사람이었다. 미들네임이 무려 퓌르흐테고트(Furchtegott), 영어로는 'fear god',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이다. 17~19세기 독일어 성명에는 이렇게 신이 끼어든 이름이 많다. 고트프리트(Gottfried)는 '하느님의 평화'이고 고틀리프(Gottlieb)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이라는 의미다. 고틀리프 다임러는 신의 사랑을 듬뿍 받아 내연기관과 자동차 개발의 선구자로 이름을 드날렸는지도 모른다. 고트힐프(Gotthilf)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이여 도우소서'이다. 독일의 수리논리학자 고틀로프(Gottlob) 프레게의 이름은 '하느님을 찬양하라'라는 뜻이다. (137쪽)

 

언어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의 유쾌한 읽을거리들 중 하나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본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살았던 터라, 여러 언어가 가능할 뿐더러 번역가라는 직업으로 인해 언어와 관련된 이야기는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또 재미있기도 하다. 책 끝에 붙은 부록은 책을 덮을 때까지 다시 보게 만들었다고 할까. 고트프리트가 하느님의 평화라는 뜻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도쿄사람: 내가 한 턱 내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
오사카 사람: 세 사람 먹은 걸 다 합해서 셋으로 나누면 얼마지?
나고야 사람: 어떻게 하면 돈 안 내고 얻어먹지?

도쿄사람은 돈을 후가게 잘 쓰고, 오사카 사람은 셈을 잘 하고, 나고야 사람은 인색하다는 우스갯소리다. (67쪽)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가 이렇게 구별된다는 사실도 재미있고, 러시아 피나무 벌꿀은 죽기전에 먹어야 할 필수템이 되었다. 놀랍게도 러시아산 피나무 벌꿀이 수입된다는 사실. 

 

꿀은 이제까지 먹어본 것 가운데 러시아에서 맛본 피나무꽃꿀이 가장 맛있었다. 스위스 알프스 산등성이에서 채집한 유기농 벌꿀, 이런 거 다 소용없다. 스위스 유기농 식품점에서 엄청나게 비싸게 파는 고급스러운 꿀을 몇 종류 맛본 적이 있지만, 러시아 피나무꿀에 비하면 맛과 향기가 밋밋하여 상대가 안 된다. 여기서 포인트는 '피나무'다. 다른 꿀은 러시아도 평범한다. 피나무는 러시아어로 리파, 독어로는 린덴바움(Lindenbaum)이라고 부르는 나무다. (117쪽)

 

다른 에피소드들도 많은데, 그건 책을 읽으면 될 일이다. 뭐랄까. 눈 앞에서 그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자세한 묘사와 설명은 이 책의 장점이다. 토요일 오전 커피 한 잔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읽기 좋은 책이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의 편도 제거 수술도 잘 이루어졌고 파스키탄에서 걸린 코로나에서도 완쾌되었다고 책 후기에서 이야기해주니, 나 또한 기분 좋은 독서를 했다.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에 꽂혀 계속 이런저런 책과 동영상을 보고 있으니, 어린 아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자고 한다. 산티아고 가면서 아예 스페인에서 몇 달 머물다 올까,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그 햇살을 생각하면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30%는 사막화의 위험이 있고 심지어 19세기까지 사자가 살았던 곳이라고 하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잠시 외국에서 살아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턱없이 모자란 시기가 되다 보니... 

 

이 책은 독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