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하련 2023. 7. 1. 16:16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지음), 송은경(옮김), 민음사

 

 

'위대한 집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숙고해 보지 못한 어떤 총체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45쪽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왜 스티븐스의 집사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연신 재미있어하며 읽고 있었다. 실은 대부분 의미 없는 에피소드들이다. 스티븐스이 캔턴 양을 찾으러 가는 동안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스티븐스과 캔턴 양과의 관계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에 익숙한 독자는 이 관계에 호기심을 가지며 읽지만, 켄턴 양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이야기마저도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한 번 잡은 독자는 소설을 끝내기 전까지 이 책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단연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재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듯 싶다. 참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토록 재미있게 서술하다니.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들 하나하나 엮어, 지나간 영국 사회의 작은 풍경 하나를 만든다. 명문가의 저택에서 일하는 나이든 집사의 회고록이라고 하기엔 이 소설의 결말은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다. 그러나 이 해석도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 또는 인생이란 사회가 제시하는 형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대에만 가능한 것일 뿐, 스티븐스은 결코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자신의 본분을 강조하며 집사란 어때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일종의 역설로 받아들일 뿐.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 돌이킬 수 없다. 그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인생을 가질 뿐이다. 솔직히 지난 시간들이 후회스럽고 안타깝게 여기게 된 건 근래의 일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관념은 근대(모던)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스티븐스는 앞뒤가 꽉 막힌 보수주의자이다. 그는 결코 자신의 직무에서 벗어나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어떤 사람에서든 가치있게 살아온 집사라면 결국 한 번은 기회가 찾아오게 되어 있다. 마침내 탐색을 끝내고 "이 주인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고귀함과 존경할 만한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 이제부터 내 한 몸 다 받쳐 이 분을 섬기겠다"라고 자기 자신에게 단언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 251쪽

 

정말 매력적인 소설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직접적인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며 스티븐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집사에 대한 스티븐스의 생각, 태도, 가치나 철학은 충분히 설득력 있고 저래야만 한다고 독자마저도 설득당한다. 설득당한 다음 만나는 이가 유감스럽게도 캔턴 양일 뿐이다. 그 뿐이다. 그런데 원래 인생이 이런 것이다. 지나보면 아는 것이다. 후회는 아니지만, 그 땐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셔야할 주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스티븐스는 다시 목표를 세우고 농담의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오늘 오후이거나 내일들 뿐이니, 더 이상 어제를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새로 나온 번역서의 표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