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사

성 바르톨로메오 조각상

지하련 2023. 7. 8. 13:14

 

 

마르코 다그라테(Marco d'Agrate, 1504-1574)의 조각상 <성 바르톨로메오>은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안에 있다. 내가 왜 이 작품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보고 끔찍해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12사제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형을 당하며 십자가에 묶인 채 순교하였다. 그래서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상징은 벗겨진 살가죽과 칼이다. 아래 조각상에서 몸을 두르고 있는 것이 바로 벗겨진 살가죽이다. 그래서 몸은 처참할 정도로 드러나 보는 이를 아프게 한다. 

 

Statue of St. Bartholomew, with his own skin, by Marco d'Agrate, 1562

 

전형적인 매너리즘(*) 작품으로 흔들리는 신앙을 잡기 위한 처절함이 드러난다. 16세기는 심리적 차원에서 중세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시대다. 양식적으로는 근대로 넘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급격한 세속화의 과정의 반영일 뿐,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속적 세계의 확장은 중세적 세계를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 때나 우리가 세속의 고통, 불합리 앞에선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을 향해 호소하게 되고 매달린다. 지금도 그러한데, 16세기 이탈리아라면 어땠을까. 크고 작은 전쟁들이 도시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던 그 당시라면.  

 

Statue of St. Bartholomew, with his own skin, by Marco d'Agrate, 1562

 

Statue of St. Bartholomew, with his own skin, by Marco d'Agrate, 1562

 

 

Statue of St. Bartholomew, with his own skin, by Marco d'Agrate, 1562

 

후기 고딕에서의 자연주의는 인위적이라면 매너리즘에서의 자연주의는 너무 심리적이어서 마치 현대를 보는 듯하다. 마치 마크 퀸의 <<자화상>>을 보는 듯한(*). 매너리즘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아름다운 거짓 대신 고통스러운 진실과 마주한다. 그 진실이 그동안 믿어왔던 어떤 세계가 무참히 부서지는 것일 지라도. 이런 측면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대부분도 매너리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중세는 갔고 아직 근대는 오지 않은 어떤 과도기.  

 

Saint Bartholomew displaying his flayed skin, with the face of Michelangelo in The Last Judgment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인 '성 바르톨로메오'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넣었다.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졌던 걸까. 예술의 역사 속에서 매너리즘은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이며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이 시기가 지나면 마치 중세는 갑자기 그 빛을 잃어버리고 유럽 대륙에선 신앙은 극적으로 그 영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종교적 주제나 소재는 인간의 호기심과 흥미를 북돋아주는 요소로 변한다. 그래서 시선을 잡아끄는 극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보여주었던 진실된 신앙심 따위는 느낄 수 없다. 마치 연극적이라고 할까.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냥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작품으로 전락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근대적 관점에서는 드디어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진정적으로 인간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로크 시대의 본질이다. 

 

The Martyrdom of St. Bartholomew, Giovanni Battista Tiepolo, 1722

 

티에폴로는 어둠과 대비시키며 바르톨로메오의 밝은 살갗을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사람들은 이 작품 앞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처럼 보여질 뿐이다. 바로크 양식의 특징들이 골고루 반영되어 있으나, 신앙적 감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르코 다그라테의 조각상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근대의 관점에선 마르코 다그라테의 양식은 건강하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도 그랬다. 이 작품은 한동안 추하다는 이유로 대중에게 공개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대도 건강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데미안 허스트는 바르톨로메오 성인을 주제로 <<강렬한 고통Exquisite Pain>>이라는 작품 2개를 만들고 하나는 도금을 해버린다. 

 

Exquisite Pain, Damien Hirst

 

위 사진보다는 아래 사진이 원작에 더 가까울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현대의 관점에서 신앙을 묻는다. 심지어 이 작품은 영국 런던의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교회(St Bartholomew the Great)에 있다. 황금은 고대로부터 신성한 의미를 가진 상징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는 불사의 상징이었으며 고대 이집트에선 태양이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이 작품을 기증한 데미안 허스트에 대한 감사의 말을 잊지 않고 있다. 

 

Exquisite Pain, Damien Hirst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황금을 신성함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켰다. 물질적 욕망의 상징처럼 변화시켰다고나 할까. 이런 측면에서 아래 <<강렬한 고통Exquisite Pain>>이 더 진실되어 보인다. 그래도 마르코 다그라테의 작품만 하지 못하다. 

 

Exquisite Pain, Damien Hirst

 

 

 

* 매너리즘에 대해서는 https://intempus.tistory.com/450을 참고하시길.

* 마크 퀸Marc Quinn에서 대해서는 https://intempus.tistory.com/932을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