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터 쾰러Walther Kohler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에라스무스-분위기Erasmus-atmosphere"에서 더욱 자유롭게 숨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에라스무스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대신 군중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의 메시지 자체는 실용적 의미가 거의 없었으며, 그의 메시지가 낳은 것은 운동이 아니라 분위기, 한밤 중의 순간적 불빛같이 막연하고 요정의 약속 같이 막연한 분위기였다. 루터파는 있었지만 에라스뮈스파는 없었다.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28쪽(문학동네)
2.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안다고, 바른 생각을 하는 것도, 옳은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서 정착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크라카우어의 생각처럼, 그저 어떤 막연한 분위기 속에 있을 뿐인가. 최근 롤란드 베인턴의 <<에라스무스>>(박종숙 옮김, 현대지성사)를 구입하면서, 소란스러운 세상을 버티게 해주는 이는 결국 에라스무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3.
가자지구는 마치 감옥과 같은 곳이다. 어떤 이동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이스라엘과 관계를 회복한 이집트가 국경을 봉쇄했다), 전기와 물은 언제나 부족한 곳이다(80퍼센트의 사람들이 오염된 식수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를 당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마치 홀로코스트와 같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까 한 때 궁금했는데, 지금은 궁금하지도 않다.
트럼프의 미국을 비난했는데, 바이든의 미국은 나름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척하면서 트럼프보다 더 어둡게 국제 정세를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 해결 능력이 제로이면서 말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떠벌리는 욕심많은 동네 형이랄까.
4
백승욱의 <<연결된 위기>>(생각의 힘)를 읽고 있는데, 19세기말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이 상당히 적절해 보였다. 지금의 상황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다 아는 내용이긴 하지만. 열역학 제 2법칙처럼 복잡성은 증가할 수 밖에 없고 이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는 한 개인이, 한 마을이,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소통과 연대가 중요한데, 바이든의 미국이나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은 소통과 연대와는 거리가 멀다. 하긴 윤석열의 한국도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전 세계적으로 거의 비슷한 리더십으로 채워지다니, 마치 전세계 사람들이 인류의 몰락을 향해 단합이라도 한 것인가.
5.
아이에게서 A형 인플루엔자가 나에게로 옮겨왔다. 하루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식은땀을 비오듯 흘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는 예정된 회의에 참석했고 저녁 식사 자리에 나갔다. 몇 개의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금요일이 왔다. 몇 개의 일들은 미뤘다. 식사를 하며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 이야기를 했는데, 여운이 길게 남아 신기했다.
에라스무스 분위기를 같이 보낼 사람들이 필요한 요즘이다. 서로에게 무심해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