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알렉스 Det er Ales
욘 포세Jon Fosse(지음) 정민영(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시간은 겹쳐지고 각기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대화를 하며 사라진다. 어슬레의 실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하여 그 공간 속으로 어슬레의 고조할머니가 등장하면서 약간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욘 포세 만의 흥미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마치 한 무대의 한 쪽 편에서 현재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다가 그 무대의 불이 서서히 꺼지면서 다른 편 무대에 불이 환히 들어오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전개되듯 소설의 문장도 그렇게 이어진다. 지극히 연극적이거나 영화적인 수법이다. 이렇듯 현대의 장르는 서로 다른 장르들에게 영향을 주며 각 장르들의 표현 방식을 풍성하게 만든다.
나는 방의 그 곳 의자에 누워있는 싱네를 본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모든 것들, 오래된 탁자, 난로, 나무상자, 오래된 벽의 무늬목, 피오르드 쪽으로 난 창문에 시선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늘 그렇듯 똑같고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다르다, 그녀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을 뿐, 날들이 오고 날들이 간다, 밤이 오고 밤이 간다, (3쪽)
그러나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짧은 서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겹쳐지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노르웨이 한 가족의 연대기를 들려주지만, 한국의 독자에게 대단한 호소력이 지니거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선사하지 않는다.
현대 소설 작법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상당히 실험적이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읽는 독자에겐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노르웨이 독자에겐 어떻게 읽히질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욘 포세라는 작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소설의 작법만으로도 꽤 흥미로웠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국도를 따라 길을 내려간다, 그리고 그녀는 한 여자가 소리치는 걸 듣는다, 어슬레, 어슬레, 그리고 그녀는 보트 창고의 모서리를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멈춰선다, 그리고 거기 해안에서 그녀는 브라타의 길고 숱 많은 머리를 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브리타가 어슬레, 어슬레 소리치는 걸 듣는다, (83쪽)
이런 측면에서 현대 소설의 본령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욘 포세는 상당히 의미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이미 유럽에선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작가이기도 하며, 이미 국내에도 다수의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다.
"작가로서 내가 흥미를 갖는 것은 심리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성격의 원형을 묘사한다. 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싶다. 정체성이 아니라 여러 관계들이 우리의 삶을 조종한다. (…)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물들이 서로에 맞서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들이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가, 그들 사이에는 어떤 소리가 존재하는가다." - 욘 포세 (113쪽)
욘 포세는 소설만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극작품도 함께 쓴다. 확실히 서사를 구성하거나 인물의 관계를 드러낼 때도 극적이다. 이런 측면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경험하기 위해서도 욘 포세는 흥미로울 듯 싶다.
욘 포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자, 바로 새로운 소설을 번역해서 내는 역자들이나 출판사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 번역이 다른 번역들과 달라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데. 다행히 욘 포세는 이미 여러 권의 소설이 번역되어 있었던 터라, 예전에 번역된 소설을 찾아 읽으면 좋을 듯 싶다. 그러나 대중적이진 않은 소설가라는 걸 알고 집어들길.
"내가 쓰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것은 해변의 바에서 들려오는 소리, 가을의 어둠, 좁은 마을 길을 걸어내려가는 열두살 짜리 소년, 바람 그리고 피오르드를 울리는 장대비, 불빛이 새어나오는 어둠 속의 외딴 집, 어쩌면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 … 이러한 것들이다." - 욘 포세 (118쪽)
참 세상에는 좋은 소설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너무 많다. 시간이 날 때마다 좋은 작품들을 읽어야지 하지만, 쉽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