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이야기 Het Volgende Verhaal
세스 노터봄 Cees Nooteboom (지음), 김영중(옮김), 문학동네
이것이, 내가 믿는 그것이다.
육체적 죽음의 거친 고통이 아니라,
존재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데 필요한
신비로운 정신적 행위에 비할 데 없는 고통이다.
그 고통은 쉽게 찾아온단다. 알겠니, 아들아.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투명한 것들>
공허함, 그것은 어지러워하는 개의 눈에서 볼 수 있는 공허함이다.
내가 그 낯선 침대에서 느꼈던 것도 공허함이다.
(13쪽)
사랑이야기지만, 사랑에 대해선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단어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히 사랑이야기다. 동시에 불륜이야기다. 동료 교사 유부녀와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한참 어린 제자에 대한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이 소설의 대부분은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한 작중 화자의, 서정적이며 지적인 독백으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나 유부녀와의 애정 행각은 부서졌고 제자를 향한 사랑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정이었을 뿐, 결론은 아니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내내, 그리고 소설을 덮고 난 다음까지도 독자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독자들은 궁금해한다. 그런데 그럴 땐 혀를 내밀어야 하나, 생각했다.
자주 그러듯 나는 혀를 내밀어 보았다. 돼지 같이 볼품없지만 내 신체 가운데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다. 거울 앞에 서서 혀를 내밀어보면 대개는 정신을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묵상의 한 형태라고 해두자. (31쪽)
혀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그는 고전어교사인 '헤르만 뮈서르트'였다.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지금 리스본의 호텔방에서 눈을 뜬다. 암스테르담 집에서 잠들었으나, 다음 날 리스본의 호텔에서 일어난 그는 하나하나 자신을 돌이켜보기 시작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나는 추했고, 아름다움은 내 열망이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즉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신비스럽고 변형적이며 죽은 언어의 보호 갑옷 뒤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죽음! 그 언어들이 죽은 것이라면 나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낸 예수 그리스도였다. (33쪽)
하지만 소설은 자신에 대한 회고들은 일부이며, 도리어 독백, 생각, 수다 등이 뒤섞여 이어지며,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보여준다. 어쩌면 변명일지도 모른다. 또는 반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결정난 사건에 대한 끝없는 후회일지도 모른다.
시계에는 두 가진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불가사의한 것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시간은 얽매인 데 없는 측정 불가의 현상이며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순서의 외양을 입혀 주었을 뿐이다. 시간은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을 수 없도록 해주는 체계다. (44쪽)
삶이란 계속 채워지는 인분통이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끌고 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라틴어 원본을 읽어본 적은 없다. (58쪽)
시간은 유형의 세계를 점점 더 느리게 늘려 형태를 부수고 빠르게 기다란 한 가닥의 수평선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느림은 빠름이었다.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 것이다. 당신은 수축과 팽창이 자유롭게 일어나는 꿈 속의 시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떠남, 사라짐은 육지의 마지막 한숨일 뿐이다. (86쪽)
하지만 이런 문장들은 결국 주인공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을 향해 간다.
삶의 공간은 너무나 비어있고, 너무나 열려있다. 우리는 무언가에 자신을 붙들어두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고안해냈다. 이름, 시간, 치수, 이야기 등등. 그러니 나를 그저 내버려두기 바란다. (87쪽)
이미 나는 당신에게 가고 있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이다. 거기 앉아 나를 기다리는 여자가, 내가 제일 사랑했던 크리톤의 얼굴을 한 바로 내 제자였음을 모를 것이다. 그녀는 매우 젊어서 당신과 불멸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그녀에게 들려주었고, 당신에게 들려주었다.
계속되는 이야기를. (144쪽)
세스 노터봄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세스 노터봄만 쓸 수 있는 사랑이야기다. 이 소설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장광설과 같은 글들이 이어지지만, 그 하나하나 지루하지 않고 독자의 마음은 생물교사인 아리아 세인스트라와 제자인 리사 딘디아를 오간다. 그리고 사랑에 실패한 뮈서르트의 창피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세스 노터봄의 대표작인 <<계속되는 이야기>>는 실패할 사랑에 대한 담담한 회고와 후회를 돌려돌려 말하는 소설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랑에 대해, 또는 대부분의 사랑에 반성하며 후회하고 아파한다. 하지만 그토록 후회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계속되지만, 삶은 끊어지고 배는 타르타로스에 도착한다. 계속되는 사랑 이야기지만, 뮈서르트도 나도, 당신도 더 이상 사랑을 나눌 수 없다. 이제 사랑은 그들의 몫으로 남고 뮈서르트도, 나도, 당신도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물러나며 소설은 끝이 난다.
* *
세스 노터봄은 상당히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그것이 소설의 서사에 적절하게 녹아들게 한다. 아마 이것이 세스 노터봄만이 가진 매력이 될 것이다. 몇 년 째 여행에 가서만 읽고 잇는 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이후 최고의 기행 산문이다.
바다는 파에톤의 죽음의 질주처럼 내 단골이야기 중 하나였다. 나는 심지어 파에톤의 죽음의 질주를 흉내낼 수 있었다. 바다는 어둡고 악의에 찬 모습으로 출러이며 평평한 지구 둘레에 펼쳐져 있다. 바다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속성으로 낯익은 사물들의 윤곽을 사라지게 한다. 바다는 카오스이며 세상의 위험한 이면이다. 바다는 우리 선조들이 자연의 죄라고 불렀던 새로운 노아의 홍수의 영원한 위협이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가 끝난 뒤 서쪽에는 해가 지고 빛이 소멸되어 또다른 형태 없는 밤의 손아귀에 인간들을 내던졌던 바다가 있었다. 신인神人 아틀라스가 서 있던 곳의 그 바다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아틀라스의 바다 너머에는 어두운 죽음의 나라, 사투르누스가 추방된 곳인 타르타로스가 있다. 사투르노 테베브로사 인 타르타라 미소(Saturno tenebrosa in Tartar misso. 사투르누스가 어두운 타르타로스로 추방되었다) (94쪽)
소설의 구조에 대해 세스 노터봄은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죽음 이후의 독백이 위주인 소설로는 르 클레지오의 <<침묵>>이 있는데, ... 이 소설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런데 아래 문장을 읽은 나는 다소 실망스럽긴 했다.
독자들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내게는 아주 간단히 말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한 남자가 암스테르담에서 죽고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전 생애가 눈 앞을 지나간다. 그것이 이소설의 요지다. - 세스 노터봄(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