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안고 단편집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지음), 유은경(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자정쯤 잠에서 깼다. 지금은 낯설지만, 실은 수백 년 전엔 일상적인 패턴이었다. 밤의 어둠을 촛불로 몰아낼 수 없듯이, 전등이 등장하기 전 대부분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저녁 잠에 들어 자정이나 이른 새벽에 깨어, 한밤 중 산책을 나서곤 했다. 유럽에서도 그랬고 조선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밤 늦게까지 밝은 전등 아래 생활을 할 수 있다 보니, 새벽에 잠에서 깨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쉬이 피곤해지는 나이 탓으로 집에 오면 바로 잠을 청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새벽에 깨어 어슬렁거리곤 한다. 오늘 그렇게 잠에서 깨어,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바토슬랴프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r)의 라흐마니노프 <The Seasons>를 들으며,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들을 읽었다. 읽기 전엔 책상 안쪽 은색 촛대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이고 차갑고 어두운 방 안에 희미하고 따스한 불빛으로 채워지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 작은 방 안이, 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따스해지기 전에 소설은 끝나고 사카구치 안고의 세계를 사람들은 잊어버릴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없겠지, 아마.
여러 책에서 이미 사카구치 안고를 들었지만, 그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그러나 얼마나 매혹적인가. 나는 왜 이제서야 사카구치 안고를 읽게 되었는가. 그가 그려내는 세상은 조금은 당혹스럽고 즉흥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늦봄 햇살처럼 육감적이어서, 어느 부분은 너무 퇴폐적이라, 나도 그 속에 살짝 내 몸을 빠뜨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마치 일식 초밥이나 모듬회에 놓여진, 윤기가 흐르는 생선회의 표면 같다고 할까. 하지만 이 비유는 안고의 세계 일부만을 드러낼 뿐이다. 탈출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늘 유혹에 넘어간, 또는 자신을 쉽게(혹은 어렵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 인물들이 전후 일본을 견디며 살아낸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너지고 세상과 싸우지 않고 뒤로 물러서며 느린 동작으로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상처 입지 않고,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온 탓에, 새로 생기는 상처에 흔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 후, 패전 일본의 모습이 정말 이랬을까. 의욕 없는 인물들이 등장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듯 소설은 전개된다. (그렇다면 해방 한국은, 전후 한국은 어땠을까. 왜 우리는 그 한국을 살았던 이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까)
이 여자를 버릴 의욕도 결백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티끌만한 애정도 없었고 미련도 없었으나 버릴만한 의욕도 없었다. - <백치> 중에서 (48쪽)
하지만 그 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아프고 슬프고 때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안고는 스스로 무너져 자신을 구원시키는 세계를 그려낸다. 하긴 가끔 나도 그런 생각에 휩싸였던 적이 있었으니. (그리고 그는 <타락론>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어제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기미코의 표정을 보는 것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외투를 보는 기이함이 어두운 정욕에 대한 회한과 애정의 애절함을 불러일으켰다. - <백치> 중에서 (62쪽)
결국은 혼자 남는 세계인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혼자였던 세계였던 걸까. 상대의 애정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욕망에만 관심을 가지는 세계다.(가라타니 고진이 <<탐구>>에서 이야기했던 '독아론'을 떠올리는 건 비약일까.)
이런 얘기들 역시 나에겐 아무 상관없는 세계이고, 아버지는 하여튼 형을 ‘가문’의 대표로 여기고 있었으니, 나와는 부자 간의 관계가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보다 아버지가 있는 나에게는 아버지가 무(無)였기에, 오직 먹을 갈게 하는 불쾌한 노인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 <돌의 생각>중에서 (90쪽)
전쟁으로 가족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가족은 없었다. 가족의 모습은 희미할 뿐, 가족은 우리가 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모습의 가족이 아니다. 전쟁 탓일까. 전쟁 탓이라고 하기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아무 감정도 없는 듯 서술된다. 그래서 반-전쟁의 메시지도 없고 전쟁은 마치 여름날 갑자기 들이닥친 비바람 같이 한 번 지나가는 듯 표현된다. 그렇게 혼자라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혼자서 살아가는 세계를 그리고자 하지만, 혼자 살긴 쉽지 않다. 고독스럽게 태어났지만, 고독스럽게 살고 싶진 않다.
만개한 벛꽃 숲 아래의 비밀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고독’이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더 이상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고독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 (159쪽)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사카구치 안고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라고 한다. 훈도시라...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카구치 안고와 그의 아내 미치요를 생각했다.
그러나 구스미를 향해 황홀하게 웃으며 두 팔을 뻗고 다가가 내 가슴에 그의 백발을 꼭 껴안고서 손가락으로 쓰다듬거나 만지작거리며 정신없이 애무하다 보면, 나의 웃음띤 얼굴도 내 팔도 손가락도, 나의 진정한 다정함이 임시로 형체를 가진 정령, 요정, 상냥한 정령, 감사하는 정령이 되어, 더 이상은 팔도 얼굴도 내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천성적으로 첩 기질을 타고난 모양이다. -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 중에서 (196쪽)
스물넷의 미치요와 마흔하나의 사카구치 안고.
그 남자들 대부분은 이전부터 자주 내게 구애해 왔지만, 나는 그들에게 소집 영장이 나와서 출정하기 전날 밤이라든가 이삼일 전, 그런 때에만 허락했다. 훗날 아가씨들 사이에서 출정 전날 밤에 육체관계를 해 출정을 격려하는 게 유행이라고 들었지만, 내 경우에는 그런 늠름한 의미는 없었다. -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 중에서 (175쪽)
무심하고 느린 사치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전쟁 속에서 가족을 잃고 어느 나이든 남자의 첩으로 살게 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의 소재나 주제가 아니다. 외부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 지겠지만, 어쨋든 사치코는 구스미를 사랑하며 그와 애정을 나누며 교태를 부리며 살아간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겐 상처가 되겠지만,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애초에 삶이란 그렇다.
나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 아들이나 딸에게 아버지란 별 것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대수로울 것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스미도 그런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안다, 그는 사랑에 눈이 멀기 전에 고독에 눈이 멀었다. 그러므로 사랑에 눈이 머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누선마저 나사가 풀려 툭하면 눈물을 흘린다.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가 어떤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 때, 그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 그 사람처럼 영혼이 고독한 사람은 인생을 관념적으로 보고 있어서,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조차도 관념적으로밖에 파악하지 못해, 나를 사랑하면서도 내가 아닌, 누군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 그런 관념을 만들어 내, 나를, 현실을 파악하는 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다. 그의 영혼은 고독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냉혹하다. 그는 만일 나보다 더 귀여운 애인이 생긴다면 매정하게 나를 잊을 것이다. 그런 영혼은, 그러나 남을 매정하게 버리기 전에 자신이 버림받기 때문에 그는 지옥의 벌을 받는다. 다만 그는 지옥을 싫어하지 않고 지옥을 사랑하니까, 그는 내 행복을 위해서 나를 딴 사람과 결혼시키고 자신은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도 좋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도깨비였다. -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 중에서 (235쪽 ~236쪽)
이 작은 단편집 끝에 실린 이 소설은 사카구치 안고의, 아내에 대한 마음을 살짝 드러내고 있다. 결국은 고독한 개인이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같이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객사할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긴다. 나는 전재(戰災)로 피난 간 초등학교 풍경을 떠올리며, 그런 더러운 빨간 도깨비 파란 도깨비들이 뒤섞인 데서 객사한다면, 그곳이 내가 죽을 장소라면, 그곳에서 객사해도 좋다. 내가 거적에 돌돌 말려 죽어 갈 때 파란 도깨비 품에 안겨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 광야나 캄캄한 불탄 자리 같은 곳, 사람 하나 없는 심야에 쓸쓸히 죽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도저히 적막을 못 견딘다. 나는 빨간 도깨비 파란 도깨비들하고라도 함께 있고 싶다, 어떤 데라도 도깨비든 귀신이든 남자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나는 있는 온갖 교태를 부리고, 그래서 나는 교태를 부리다가 죽고 싶다. -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 중에서 (239쪽 ~ 240쪽)
가끔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사카구치 안고와 같은 작가를 만날 때다.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관으로, 일본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나올 때, 애처롭다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건 일본적 세계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 시대 전체가 그렇게 혼자여서 힘들고 그것이 싫어 혼자가 아닌 둘로 살아가지만, 그것마저도 힘에 부치기 때문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은 없고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욕망만 남아있는 모습이 슬픈 것일까.
아마 그를 십년 전이나 이십년전에 읽었다면 나는 열광적으로 그의 세계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떤 규칙으로 세계는 돌아가지만, 그 곳에서 남는 건 '나'이거나 '내 옆에 있는 너'뿐이다. 가족이고 싶지만, 전통적 의미의 가족은 전쟁 속에서 사라졌다. 전후 일본 사람들은 그 토양 위에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일본의 전후 문학이든, 아니면 다른 나라의 전후 문학이든, 쇼아 이후의 유대인이 쓴 작품이든, 그런 작품을 읽을 때면, 한국의 전후 문학은, 전후 세대는, 그들이 마주하고 그렸던 것은 어떠했는지 궁금해지지만, 글쎄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나 아픔을 억지로, 강제적으로 꿰매고 잊어야만 했던 건 아닐까.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언뜻언 묘사하는 전쟁의 풍경을 읽으면서 전후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왜일까.
사카구치 안고의 다른 소설들도 챙겨서 읽어야겠다. 가즈오 이시구로 다음 읽게 되는 소설가가 사카구치 안고라니, 흥미롭다. 아주 느리게,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의 소설을 읽고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