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일요일 잡담 - 자유와 경제적 불평등

지하련 2024. 1. 14. 08:13

 

진영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책마저 오독하게 만든다. 아니면 한 개념이 가지는 풍부한 스펙트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너무 정치적으로, 우생학의 관점으로만 접근했던 것같다. 룰루 밀러는 스탠포드 대학 초대 총장의 우생학을 보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성장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더 나아가 차이(다르다는 것)를 받아들이면 내가,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을 적고 있었는데. 하긴 그러기엔 우생학이 그토록 뿌리깊게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그 흔적이 한국 사회에서도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리처드 윌킨스과 케이트 피킷의 <<평등이 답이다>>를 보면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정신병이나 미성년자 임신, 가정 폭력 등이 일어난다고 풍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면 이야기한다. 십여년 전 이 책이 나왔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지만, 아직도 일부의 관심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것저것 다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은 스스로 편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신분제가 있다거나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에 아마티아 센은 확실히 자유는 역량이라고 강조한다.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역량을 빈곤층과 여성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는 권리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인 셈이다.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서의 발전>>을 읽은 한국의 몇몇 독자들은 '자유'에만 방점을 두고 그 대척점에 있는 '평등'주의자(진보)를 공격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아마티아 센은 한국의 보수보다 진보 진영에 더 가까운 학자다. 왜냐면 그는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경제학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가끔 논리도 없고 막무가내로 근거 없는 주장만 해대고 공격적인 발언을 하는 동영상을 보기도 한다. 더 놀랍게도 그런 동영상에 현혹되어 책임지지도 못할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만난다. 실은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본다면 달라질 텐데.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한데, 상당히 어렵다. 이미 닫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구성적 역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실질적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와 관련된다. 실질적 자유란 글을 읽거나 쓰고 계산할 줄 아는 것, 정치에 참여하고 검열 없는 언론을 향유하는 것과 관련된 자유뿐만 아니라 굶주림, 영양실조, 질병, 조기사망을 피할 수 있는 기본적 역량도 포함된다. 구성적 관점에서 발전은 이러한 기본적 자유를 확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발전이란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과정이며 발전을 평가할 때에는 이러한 고려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 아마티아 센, <<자유로서의 발전>>, 84쪽 

 

예를 들어, 계층화된 사회에서 통상적인 낙오자들, 배타적인 공동체에서 억압받는 소수자들,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불안정한 소작인들, 착취적인 경제 제도 속에서 일상적으로 초과노동을 하는 공장 노동자들, 심각하게 성차별적인 문화 속에서 희망 없이 종속되어 있는 가정주부들. 이렇게 박탈당한 사람들은 수준히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어떤 급진적 변화를 요구할 용기를 잃거나 어떤 바람도 없이, 가능한 한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조정하려 할 수 있다. - 아마티아 센, <<자유로서의 발전>>,  118쪽

 

그리고 그 틈을 잘못된 미디어가 파고 든다. 일종의 도파민 같은 것이다. 증오와 분노, 피해의식을 조장한다.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잘못으로 몰고 간다. 그 결과 참혹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미디어는 반성하지 않는다. 실은 그 참혹함마저도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돈 없는 이들이 돈을 빌려 고급 자동차를 사고 명품으로 인스타그램을 포장하는지 아는가. 왜냐면 자신들도 대우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즉각적인 반응을. 허위로라도 대우를 받고 자존심을 살리고 싶은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위로라도 자신을 포장하고 싶다. 나는 구태의연하게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잘못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대응이며,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이미 그렇게 변해 버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