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만에 조계종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사이 조계종 내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것인지, 아니면 주변을 새로 단장한 것인지, 모습이 좀 변한 듯 했다. 건너편에도 템플스테이 안내센터가 있었고. 대도심 중심지에 큰 사찰이 있는 것도, 그 사찰 앞으로 머리를 민 스님들이 오가는 풍경이 새삼 흥미로웠다. 젊은 스님들 몇 명이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나이였다. 아니면 삼십대 초반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사연으로 저들은 승려가 되었을까 생각했다. 환하게 웃으며 서로 장난을 치며 거리를 걷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당 막내 신부님을 떠올렸다.
사제 서품을 받고 바로 본당 보좌신부로 와, 영성체반과 초등학생, 중고등학생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이들의 부모들과도 교류를 갖는다는 것을 뜻했다. 세속에서의 삶과 세속에서 종교적 신념을 지키며, 그것의 모범을 보여주는 삶은 전혀 다르다.
내가 어렸을 땐, 나이가 들면 뭔가 안정적이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이 안정적이란, 젊었을 때 몸과 마음을 휘감고 도는 물결들이 잔잔해졌음을, 더 이상 눈에 뻔히 보이는 실패의 가능성들을 무시하고 도전적으로 희망과 운에 과감하게 뛰어들 무모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종의 강제된 안정인 셈이다. 대부분 이렇게 마음의 변화, 육체의 변화로 그냥 현재 모습에 안주하게 되고 변화에는 소극적이 된다. 이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가끔 낯설 때가 있다.
세속을 살아가는 젊은 성직자들을 보면서 흔들림없는 강한 신앙심으로 젊은 자신을 휘감고 도는 그 거친 바람과 파도를 견디고 있음을 생각할 때는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그 거친 바람과 파도에 몸을 실었으니까. 아니 몸을 실지 않으면 안 될 것같았으니까.
2년의 임기를 마치고 성당 부주임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가신다. 아이는 첫 영성체반을 끝내 이제 성체를 모신다. 감사한 일이다. 현대 물리학에선 이 세계는 '관계'들로 존재가 정의되고 시공간 안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아직까지도 청교도(기독교)적 근본주의가 강한 미국(한국 기독교 교회는 이러한 미국 교회의 영향 아래에서 유입되어 성장했다)에서는 창조과학을 주장하며 진화론을 부정한다. 실은 이 모든 것을 어찌 다 옳다고 주장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 과학과 신앙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동성애 커플을 축복하는 신부님들의 기사가 나왔다. 동성애는 상당히 오래된 풍속이다. 그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종교를 가진다. 신앙의 모습도 변한다. 그리고 신앙의 변화들은 모두 신에게로 수렴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관계'로 이해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같다고 할까.
그저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난 2년 동안 고생하신 신부님들 생각에 이 짧은 글을 올린다. 그리고 이번 주 미사에는 새로 오신 신부님들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