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짧은 휴식, 혹은 분실

지하련 2024. 4. 2. 22:51

 

하늘의 푸른 빛이 보이지 않았다. 목이 답답해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의 시작을 대륙에서 날아온 모래먼지들이 알려주었다. 반도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남자의 삶도 불투명한 대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한 남자가 길을 서성거렸다. 거리는 어두워졌고 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켰다. 와이퍼가 비소리에 맞추어, 자동차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메트로놈처럼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 남자도 건널목 앞에서 왔다, 갔다, 왔다 하였다. 비가 내렸지만, 어둠 속에서 비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비의 존재를 소리로, 살갗에 닿는 익숙한 차가움으로, 펼쳐진 우산 표면의 작은 떨림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어느 저녁, 그는 지하철역 근처 실내포장마차로 향했다. 

 

포장마차 입구 골목길 밖에 놓여진 간이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느 한 여인이 쏟아내는,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역정, 분노, 불쾌감을 표현하는 문장들을 말 없이 들었다. 들으면서, 계속 들으면서 마주 앉아 화를 낼 타이밍을 계속 잃어버렸다, 놓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잃어 버렸다. 혹은 잊어버렸다. 

 

그는 늘 그랬다. 아침에 집 밖으로 나갈 때, 어느 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올 때, 또 다른 부분을 잃어버렸다. 아니면 잊어버렸다. 그는 내심 그렇게 죽음을 향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늘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을 보면 부럽고,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의 아픔이 떠올라, 시작하는 연인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간이 테이블 옆으로 한소희 광고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그렇게 한소희 같은 연예인이 옆에서 술을 마셔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우스운 생각이다. 

 

밤 늦게 집 밖으로 나왔다. 밀린 일을 하기 위해 카페로 나왔다.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 뒤늦게 책임을 알게 된 탓이 크다. 어렸을 때 알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현명한 의사결정을 했을 것이며 그만큼 더 많은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사랑이었다. 나의 문제도 그랬고, 그의 문제도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 후회스러운 걸까. 매일 매일 마시는 술의 양이 늘어나는 봄이다. 늘어나는 낮의 길이만큼 술의 양도, 술의 종류도, 그리고 딱 그만큼 늘어나는 봄의 화창함이 이어지길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