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지하련 2024. 6. 2. 21:59

 

결혼 - 여름

알베르 카뮈(지음), 장소미(옮김), 녹색광선 

 

 

카뮈의 산문집을 읽는다. 몇 해 전 <<페스트>>를 읽은 후 다시 카뮈를 손에 들었다. 몇몇 문장들은 처연하게 아름다워 슬펐다. 카뮈의 세계는 역동적이지만, 죽음을 향해 있다. 무의미 앞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살아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태양과 죽음은 만난다.

 


잠시 후 압생트 풀밭에 몸을 던져 그 향이 몸에 배게 할 때, 나는 모든 편견에 맞서 진리를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진리는 태양의 진리이고, 또한 내 죽음의 진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내가 지금 내거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 삶. 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꾸밈없이 이 삶을 사랑하며, 이 삶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싶다. (23쪽)

 

이 짧은 글에서 실존주의와 무의미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봄에 티파사엔 신들이 머문다. 태양과 압생트 풀 향기 속에서, 은빛 갑옷을 두른 바다 속에서, 본연의 색으로 푸르른 하늘 속에서, 꽃들로 빼곡한 폐허와 돌무더기에 세차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속에서 신들은 말을 건넨다. 어느 순간엔 들판이 태양 빛으로 새까매진다. 두 눈은 무언가를 포착하려 애쓰지만 들어오는 거라곤, 속눈썹 끝에서 일렁거리는 빛과 색의 무수한 점들 뿐이다.(19쪽)

 

문장들 하나하나 감미롭고 평화로웠다. 문장들 밑으론 무의미가 깔려 있을지 모르지만, 카뮈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사랑했고 그리워했다. 그러게. 북아프리카 알제에서 바라보는 지중해 바다는 어떤 빛깔일까. 지중해 세계 속에서 북아프리카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 등장하지만, 지금은 일부를 제외하곤 여행을 가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현재의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알제의 카스바 Kasbah of Algiers)가 프랑스 임시 수도이기도 했는데. 그러고 보니, 자끄 데리다가 알제리 출신이구나. 

 

 

우리가 도시와 나는 사랑은 대개 은밀한 사랑이다. 피리, 프라하(심지어 피렌체조차) 같은 도시들은 자기 안에 갇혀 자기만의 특성으로 세계를 한정한다. 하지만 알제는 바다에 면한 몇몇 특혜 받은 도시들과 더불어, 입처럼 상처처럼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41쪽) 

 

자연의 혜택이 지나치면 영혼이 메마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제에 오래 살아야만 할 것이다. (41쪽) 

 

프랑스령 알제리는 그냥 프랑스로 여겨졌다. 식민지라기 보다는 그냥 프랑스 지역으로 여겨졌다.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은 그렇게 여겨진 듯하다. 하긴 이베리아 반도도 거대한 이슬람의 영토였으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카뮈의 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학업에는 관심없는 집안 환경 속에서 카뮈는 20세기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또한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때 카뮈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무의미와 허무를 이야기하는 실존주의 속에서 카뮈의 위치는 독특하다. 적어도 그는 그 무의미와 싸우는 법을 알려주니까. 그건 바로 청춘의 돌진. 

 

청춘의 특징은 어쩌면 손쉬운 행복을 누리는 그 탁월한 자질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탕진에 가까운, 성급한 삶으로의 돌진이다. (48쪽)

 

땅과 맺은 인연과 몇몇 사람들에 대해 사랑을 느끼는 것, 언제든 마음이 조화로울 수 있는 장소가 있음을 아는 것, 이것만으로도 이미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위해 필요한 확신들은 넉넉하다. (52쪽) 

 

카뮈의 고등학교 철학 선생이었던 장 그르니에에게 바친 <사막>은 그의 예술적 식견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에 대한 산문으로, 지오토, 치마부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의 토스카나 지역(피렌체가 속함) 화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산다는 것은 확실히, 표현하는 것과는 다소 상반된다. 토스카나파 거장들에 따른 그것은 세 번에 걸쳐, 즉 침묵, 불꽃, 부동 상태 속에서 증언하는 것을 뜻한다. (61쪽)

 

그 찬란함과 빛을 통해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는 대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명징한 저항처럼, 치마부에부터 프란체스카에 이르는 이탈리아 화가들이 높이 들어 올렸던 저 검은 불꽃같은 시 말이다. 토스카나 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 얼굴들은 초연하고 무심한 나머지, 풍경의 광물성 위대함에 이른다. 일부 스페인 농부들이 그들의 땅에서 자라는 올리브나무들과 닮아있는 것처럼, 영혼 따위가 웅숭그릴 극히 작은 그늘 한 점 허용하지 않는 조토의 그림 속 얼굴들도 토스카나가 아낌없이 제공하는 유일한 교훈을 통해 토스카나 그 자체와 합일하기에 이른다. 그 교훈이란 바로 감정을 뿌리친 열정의 수련, 금욕과 쾌락의 혼합, 재앙과 사랑의 중간 지점에서 인간은 자연처럼 스스로를 규정하게 하는, 인간과 대지의 공명이다. (64쪽)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산문집은 우리에게 근사한 휴식을 선물한다. 그것이 지금은 경험하기 어려운 노래일지라도 말이다. 이젠 어렸을 때부터 학원을 보내고 아이에게 자연과 대지와 함께 할 때의 그 충만함을 선물해주기 얼마나 어려운 시대가 되었는지. 어쩌면 그 기억으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기억들, 경험들을 선사하는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산문집이었다. 때론 허무하긴 하지만.   

 

묘석들이 내게 그래봤자 소용없고 인생은 '해와 함께 떠올라 해와 함께 기운다. col sol levante, col sol cadente'고 알려주었다. (68쪽)

 

신화는 그 자체로는 생명력이 없다. 신화는 우리가 형상화해 주기를 기다린다. 세상의 단 한 사람도 그 부름에 응한다면, 신화는 우리에게 자신의 진행을 원형 그대로 내줄 것이다. (127쪽) 

 

내가 이야기하는 도시들은 이들과 반대로 과거가 없다. 그러니까 버려지지도 않았고, 감회에 젖지도 않는 도시들이다. 낮잠의 시간인 권태의 시간에는 슬픔이 사무쳐서, 조용한 우울의 자리조차 없다. 아침에 누리는 햇살, 혹은 밤에 누리는 자연의 호사 속에서, 기쁨은 오히려 달콤하지 않다. 이 도시들은 명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지만, 열정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준다. (131쪽)

 

알제(Kasbah of Algiers)의 전경

 

완전한 허무주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순간, 의미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모든 가치 판단을 철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산다는 것, 가령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판단이다. 죽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그 순간 사는 것을 택한 것이고, 그렇게 상대적으로 삶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절망의 문학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절망은 침묵한다. 침묵조차 두 눈이 말을 하는 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절망은 단말마, 무덤, 혹은 심연이다. 절망이 말을 하고, 추론하고, 무엇보다 글을 쓴다면, 그 즉시 형제가 손을 내밀고, 나무가 정당화되고, 사랑이 싹튼다. 절망의 문학은 용어 자체로 모순이다. (157쪽)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