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세계사 속의 팔레스타인 문제, 우스키 아키라

지하련 2024. 7. 28. 13:39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 

우스키 아키라(지음), 김윤정(옮김), 글항아리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은 하마스의 선제 공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나,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어렸을 때, 탈무드라든가 랍비라든가 하는 책들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곧잘 듣고 읽지만, 나이가 들어보면 이런 XXX같은 민족도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저들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이해하는 바 유대인은 어떤 이들인가. 몇 권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다. 읽으면서 노트를 하다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을 옮겨 적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라, 공공도서관에서 빌려읽을 수 밖에 없지만, 정말 좋은 책이다. 한 눈에 유대와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결론이 바뀌진 않는다. 도리어 역사적으로 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이 전 세계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지 알 수 있고 현재 이스라엘의 강경 우파적 대외 활동이 이들을 더욱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것임을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여러 이유로 특별한 변화를 꾀하진 않겠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선 유대인,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잔인한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    *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둔 부분이다. 다소 길다. 군데군데 내 생각도 덧붙인다. 

 

서구 기독교도, 특히 미국의 청교도(퓨리턴이라고도 한다)들에게 성지는 특별한 곳이었다. 이들은 미국이이야말로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말에는 미국인만이 신에게 선택받아 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지상에 펼칠 수 있는 현대 민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27쪽) 

 

지금 미국 청교도들은 저렇게 생각할까. 현재 이들 대부분은 공화당 우파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 무슬림에 대한 미움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이런 상황 변화도 상당히 희극적이다. 선민의식은 참 문제다. 선민의식이 강한 나라가 두 나라가 있는데, 한 나라는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이며, 다른 한 나라는 우습게도 한국이다. 대형 기독교 교회 목사들의 행태를 보라. 이게 기도교인지, 아니면 이단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아마 미국 공화당 우파도 이런 선민 의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 국회의사당에 들어가지. 

  

 

아라비아어를 쓰는 수니파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의 다수파(31쪽)이며, 아라비아어를 쓰는 유대교도(33쪽)도 있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아랍세계에 살고 있던 유대교도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령 마그레브 3국(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을 제외한 아랍세계에서 유대교도 사회가 소멸한다. 이를 두고 ‘문명론적으로 오랫동안 무슬림과 유대교도가 공존했던 시대는 끝났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34쪽)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서로 교류하며 발전해 나가던 중동은 사라졌다. 

 

아라비아어를 사용하는 유대교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 민족적 대립이 결코 성서 시대 이후 ‘2000년 동안 반복된 숙명의 대립’이 아니라 아랍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 의식이 근대 민족주의 사상과 만나 형성된 대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5쪽)

 

아라비아어를 쓰는 기독교도, 그리스 정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아시리아 정교회, 경교, 가톨릭 교회가 431년 연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배척받자 동방으로 포교활동을 편 종파), 로마 가톨릭교도, 합동 동방 카톨릭교회, 신교도파, 루터파, 성교회(영국 국교회), 퀘이커 (36쪽)

 

예루살렘 안에서 활동했던 종파들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 있었을 테니, 정말 이 세상 대부분 종교의 발원지 같은 느낌을 준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타종교와 종파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긴 역사 속에서 종교 공동체별 세금만 내면 이들의 자치를 허락해왔다. 그렇기에 모자이크와 같은 다문화 다민족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다문화 다민족 사회였기에 국민 형성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퍼져간 국민국가에서 국민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가 보장되고, 정치 신조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며,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하거나 표현하는 등 모든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다. (41쪽)

 

아브라함적 일신교(셈적 일신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은 세 일신교의 공통 성지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41쪽) 

 

anti-semitism이 반유대주의라는 것이 우습다. 아직도 기독교와 이슬람이 같은 기원을 가진 종교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는 게 신기하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 셈의 계보를 잇는 사람으로, 아브라함의 장남이자 서자인 이스마엘을 믿는 종교가 이슬람이고, 차남이자 적자인 이삭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 계열이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일신교를 ‘아브라함적 일신교’ 또는 ‘셈적 일신교’로 부르게 된 것이다. (49쪽)

 

 

유대교 - 이스라엘에서 번성한 계시 종교 중 하나. 유일신 야훼와의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내려온 율범을 지키며, 메시아의 재림을 믿는다.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발전하나, 로마에 의해 신전이 파괴된 뒤로 율법 연구 중심의 랍비 유대교가 탄생한다.
유대교 – 계시 종교. 유일 절대적 존재인 창조주만 인정하고 믿는 일신교. (49쪽)

 

자연종교 – 종교의 발달 과정 중 초기에 해당되는 자연 발생적, 원시적 종교를 총칭하는 말이며 주로 애니미증, 주술숭배, 자연숭배, 다신교 등을 일컫는다.

구약성경 – 타나크(T.N.K) 
토라Tora(율법서), 느비임Neviim(예언서), 케투빔Ketuvim(성문서)

기독교 – 세계종교, 유대교 – 민족종교 (50쪽)

 

 

유대교도의 세계관은 신의 구제를 받는 유대교도와 구제를 받지 못하는 고임goyim(비유대교도)으로 나뉜다. 메시아(구세주)의 재림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만 구제받는다고 믿는다.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누가) – 공관 복음서
요하네(요한) –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을 이야기하며 신도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정채진 신학적 관점에서 쓰여 있다.

 마태오 복음서 11장 19 ~ 25절.
‘이사람이 흘리는 피에 나는 어떤 책임도 없다. 너희의 문제다. 그러자 백성 모두가 답했다. ‘그 피의 책임은 우리와 자손에게 있소’
마태오, 마르코, 누가 – 군중, 민중으로 표현
요한 – ‘유대인’으로 표기 (53쪽)

 

유대인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미움은 오래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이며,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했던 이들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의 역사를 서구 사회에선 다양한 방식으로 유래되고 변천되었다. '게토'도 유대인이 분리되어 살던 지역의 명칭이었다. 지금도 유대인을 좋아하는 서구인들은 별로 없을 듯 싶다. 

 

예수의 복음은 구제의 역사적 계승자로서 유대교도가 아닌 이방인(비유대교도들)을 선택한 것이다. 

사도행전 28장 28절
‘ 따라서 이 점을 알아두기 바란다. 신의 구제는 이방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이야말로 신을 따르며 복종할 것이다.’ (56쪽)

 

가토류. <일신교의 탄생: 유대교에서 기독교로>(2002)
‘차별하지 않는’ 신을 둘러싸고 인간 사이에서 ‘차별’이 발생했다. 차별하지 않는 신을 받아들이는 인간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나뉘어 일어난 차별이다. 신은 차별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했다. 신에게 인간이 저항한 것이다. 기독교 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이런 상태에 있다. (56쪽)

 

 

따라서 기독교 유대교도를 배제하고 유대교를 부정하려는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머리 속에 넣어두어야만 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예수는 유대교의 랍비 중 한 사람이었고 유대교의 세계에서 활약했다. 예루살렘에는 율법을 담당하는 바리사이Pharisaioi파 등 유대교 지배자층이 있었다. 이 종교적 지배자층의 눈에 형식을 중히 여기는 유대교를 기피하고 황야에서 신앙을 실현하려 한 에세네Essenes파의 사상을 이어받은 예수는 기존의 전통적 유대교 사회의 율법주의와 신전주의를 극복하거나 변혁을 꾀한 반역자로 보였다. 종교 지배층은 예수의 행동을 용인할 수 없었다. (57쪽)

 

아마 그들은 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그들 후손 대대로 핍박을 받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새로운 변화는 거부하면 안 된다. 지키는 방식에서도 여러 가지가 있다. 변화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 최근 뉴진스님의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다. 최근 NPR에 실린 기사를 읽다가 아래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nothing’s everlasting in this world. Don’t let your success make you arrogant. And don’t let your failure discourage you. The world goes round and round. Endure, as I did. Then a good day will come.”

 

 

이슬람이란 문자 그대로 ‘알라에의 절대복종’을 뜻한다. 알라는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 절대의 신인데, 인간의 지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유일신이다. 알라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이 무슬림이며, 모든 사람이 알라 앞에서 절대복종하는 상태가 살람Salam(평안, 평화)이다. 알라가 예언자 무함마드를 통해 내린 계시 언어가 아라비아어이고, 아라비아어로 쓰인 계전이 코란이다.
코란은 번역이 금지되어 있다. 알라의 말씀(코란Koran)은 알라가 존재한다는 ‘표식’이므로 이를 번역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번역본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는 코란의 내용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내용에 해석을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어 본문에 페르시아어 해석을 더한 코란은 본문에 해석을 단 책이지, 내용을 번역한 것은 아니다. (64쪽)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나도 그렇다. 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십자군 전쟁은 유대교도가 겪었던 박해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경계로 유럽인들에게 유대교도는 외부의 적인 무슬림과 내통하는 불구 대천의 원수로 인식되었고, 이는 십자군이 유대교도를 더욱 박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82쪽) 

 

무슬림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유대교도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중동에 살았던 유대교도들은 십자군이 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서구 사회에선 상당히 낭만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십자군이 중동에 가서 행한 짓들을 보면 차마 글로 적기 어려운 잔혹한 짓들을 엄청 저질렀다. 

 

유대교도 부흥론은 ‘전천년왕국설’ 

 17세기 중반에 발생한 청교도 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유대교도 부흥을 지원하는 일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그리하여 16세기 초반 종교개혁을 경계로 성서 해석에 관한 관점이 기존 가톨릭의 반유대적 관점에서 신교, 특히 청교도의 친유대교적 관점으로 변한다. (112쪽)

 

전천년왕국설 – 성서의 종말 예언 중 하나. 

 성서 중 종말을 다룬 문서로는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와 신약선경의 요한(요하네) 묵시록이 있는데, 요한 묵시록에 따르면 종말 직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며 사탄은 쇠사슬에 묶여,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찬 1000년이 도래할 것을 예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전후 관계에 관한 명확한 기술이 없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둘로 나뉜다. 첫째는 교회의 힘으로 천년왕국이 실현된 뒤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후(後)천년왕국설이고, 둘째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해 그리스도가 직접 천년왕국을 수립한다는 전(前)천년왕국설이다. (113쪽)

 

셀마 라겔뢰프 (Selma Lagerlof 1858-1940)의 <<예루살렘>>이라는 소설도 언급된다.  찾아보니, <<닐스의 이상한 모험>>의 작가였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스웨덴 종교집단의 이야기라고 한다. 한글로 번역된 건 없다. 

 

 

시오니즘이란 유대인이 ‘시온의 언덕’(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으로 에르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의 비유적 표현)으로 돌아와 국가를 건설하자는 사상 운동의 총칭이다. 시오니즘은 19세기 유럽, 특히 러시아 제국의 내셔널리즘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독일인이 독일인을 위한 국민국가를 세웠듯이 유대인도 유대인을 위한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127쪽)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시대의 서구 열강들이 영토 재분할을 둘러싸고 벌인 다툼의 결과물이다. (…) 특히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샴(대 大시리아, 즉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요르단) 지역은 이 전쟁으로 심각한 영향을 입는다. (142쪽)

 

1917년 11월 벨푸어 선언은 영국 정보가 유대인의 내셔널 홈의 건설 승인을 표명한 문서다. (146쪽)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세 가지 상반된 조약을 맺는데, 이 조약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발단이 된다. 어찌됐든 국익만 추구하면 된다는 영국의 전시 외교 정책이 만들어낸 모순으로 가득 찬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1915년 7월부터 1916년 1월까지 주고 받은 10통의 편지에서 영국이 메카의 샤리프(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 메디나의 수호자)인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 샤리프 후세인, 1855 ~ 1931)에게 영국 측에 서서 오스만 제국과 싸워준다면 보답으로 아랍독립국가를 수립시켜줄 것을 약속한 협정(후세인 – 멕바흔 서한)이다. 둘째로 1916년 5월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 오스만 제국령인 동부 아랍 지역을 둘로 나누어 각각 영국과 프랑스 세력권에 둔다는 비밀협정을 러시아의 승인 아래 프랑스와 체결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셋째로 1917년 11월 영국은 영국의 시오니스트에게 유대인을 위한 내셔널 홈(민족적 영토)의 수립 지지를 표명했다.(벨푸어 선언) (144쪽)

 

로이드 조지 총리는 유대인만이 역사의 수레 바퀴를 돌린다는 편견을 지녔는데, 이런 잘못된 유대인관은 프랑스를 혐오한 감정과 함께 영국 지배층이 공유했던 것으로 광범위한 지지자를 보유했다. (148쪽)

 

“터키인을 굴복시키고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영국인은 프랑스인을 팔레스타인에서 내쫓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머물렀다. 그리고 시오니스트에게 팔레스타인을 주었다. 왜냐하면 영국은 유대인을 존경하면서도 멸시하는 등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했기 때문이다. (…) 벨푸어선언은 군사적 또는 외교적 이익에서 온 것이 아니라 편견, 심정, 그리고 농간의 산물이었다. 벨푸어 선언을 고안해낸 자들은 기독교이면서 시오니스트이기도 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반유대주의자였다. 이런 사람들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 믿었다.” – 이스라엘 역사가 톰 세게브(Tom Segev, 1945~ ) (149쪽)

 

벨푸어 외상 또한 기독교 시오니스트로, 유대인 국가 건설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시오니스트의 대의大義를 지지한 영국의 결단에는 영국에서 유대인을 내쫓는다는 모순에 가득찬 반유대주의적 생각이 깔려 있었다. (149쪽)

 

당시 팔레스타인 주민인 아랍인을 종교적으로 분류하면 무슬림, 기독교, 유대교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벨푸어 선언에 따르면 비유대인은 유대교도를 제외한 주민이 되므로 무슬림과 기독교가 이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아랍 대 유대 대립이다. (150쪽)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 대부분은 이스라엘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국인들에 대한 설명이다. 영국이 사고를 치고 미국이 수습하려다가 망가진 지역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다. 서구 유럽이 근대에 끼친 영향을 지대하다. 이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20세기 초 영국은 문제투성이에 가까워 보인다. 미국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한 국가다. 그래서 제국주의를 싫어한다. 얼마나 싫었을까. 식민지에 기반한 경제 시스템을 가진 유럽 열강들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 유럽에 대한 반대 급부로 나온 것이지, 실제 식민지 국가들을 위해서 말했다라고 보기 어렵다. 우생학을 지지했던 대통령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원래 언어를 중심으로 한 민족 집단이었던 아랍인은 무슬림과 기독교도, 유대교도를 포함한 개념이었으나, 이제 아랍인에서 유대교도가 제외되었으므로 강조점이 붙은 아랍인이 되어버렸다. 벨푸어선언으로 발생한 유대인과 비유대인(아랍인)이라는 새로운 민족적 대립에 앞서 표현했듯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립이다. 이 민족적 대립이 심화, 증폭, 고착화되는 ‘장소’가 바로 위임통치 기간의 팔레스타인이다. 지금은 자주 들어서 익숙해진 ‘2000년 동안 계속된 아랍민족과 유대민족의 대립’이라는 표현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151쪽)

 

이라크라는 인공국가

(…) 하지만 사실 이라크는 석유가 필요했던 영국이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세 단체를 하나의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집어 넣어 만든 국가였다. 이라크 북부는 쿠르드인 지역(단 쿠르드인의 대부분은 수니파 무슬림), 중부는 수나파 무슬림 지역, 그리고 남부는 시아파 무슬림 지역으로, 중부와 납무 사람들만 아라비아어를 쓰는 아랍인이고, 북구와 중부는 같은 수니파지만, 민족이 다르다. (쿠르드인과 아랍인). 게다가 이라크 동부 주민의 대부부은 페르시아어를 쓰는 시아파 무슬립이어서 혼란은 점점 더 심화되어간다. (155쪽)

 

(…) 국경선을 강제로 변경하고 고정시켜 탄생한 이라크라는 인공국가는 처칠 식민지 장관에 의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57쪽)

 

중동 지역 국가들의 국경선이 직선으로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냥 자 대고 그은 것이다. 대부분 사막이며 부족 단위로 살아가던 유목민들에게 정치적 의사결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종파며, 부족이며, 언어 따윈 상관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동의 무수한 문제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 열강들이 만든 문제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난민’(Displaced Persons라고 DP문제라도 알려졌다).. (177쪽)

팔레스타인인은 경제적 통일을 바탕으로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유엔의 신탁 하에 둔다는 내용의 분할안, 이것이 유엔총회의결 181호, 통칭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아랍국가, 유대국가, 유엔관리지역(예루살렘 및 베들레헴)으로 분할이 결정되었다. (178쪽)

피란민은 아직 고향에 귀환할 가능성이 있는 단계의 상태를 가리키며, 난민은 그 가능성이 사라진 단계를 의미한다. (178쪽)

 

가산 카나파니 Ghassan Kanafani(1936 – 1972)의 <<하이파에 돌아와서>>가 책에서 언급되었는데, 오래 전에 번역된 후 이젠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이파에 돌아와서>>는 시온주의 민병대 하가나의 공격 때문에 집과 아이를 남겨 두고 떠났다가 20년 만에 하이파의 집을 찾아온 팔레스타인인 부부의 얘기다. 20년 만에 찾은 집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살고 있었고, 장성한 아이는 기가 막히게도 이스라엘 군인이 돼 있었다." (출처: https://ws.or.kr/article/30616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선언은 1990년부터 1991년 페르시아만 위기, 전쟁(걸프 전쟁)을 거치며 그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아라파트가 걸프전쟁에서 이스라엘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주민의 의지를 따라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다국적 군의 일원으로 이라크 공경에 가담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두 아랍국가와의 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어갔다. (243쪽)

 

아라파트가 사담 후세인을 지지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팔레스타인 주민의 지지를 상당 부분 사라졌겠지만, 적어도 팔레스타인 해당 기구의 운명은 훨씬 길어졌을 것이며, 지금 정도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트루먼의 무리한 이스라엘 건국 지지(243쪽)

 

찾아보니 의외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해리 S.트루먼. 아무래도 최근 루즈벨트에 꽂혀있어서 그런 듯하다. 만약 이스라엘이 건국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도 한 번 고민해볼 만하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1980년대의 중동 이슬람 세계에 이슬람을 부흥시켰고, 세계적으로도 ‘종교부흥’이라는 커다란 시류를 이뤄냈다. 이는 유럽식 근대의 모습을 되묻는 계기가 되었는데, 근대화는 정말로 세속화의 길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245쪽)

 

최근 들어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서구식 근대화를 진행했거나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가에 대해 질문을 던질 법하다. 이에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원조삭감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스라엘에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던 아버지 부시 정권과는 달리 친이스라엘 자세를 취한 클린턴 정권의 태도를 훗날 오슬로 합의에 의거한 평화교섭이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51쪽)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잡적으로 작용되었을 테지만, 실제 미국 인구의 2.2% 정도가 유대인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2004년 11월 프랑스 육군병원에서 사망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상징이었던 지도자 아라파트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을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279쪽)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사실상 분열되다. (282쪽)

하지만 하마스는 압바스 의장의 조치야말로 비합법적이라면서 파타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파타의 영향 하에 있는 요르단강 서안과 하마스의 영향 하에 놓인 가자로 사실상 분열된다. (282쪽)

 

한편 하마스의 지배 하에 놓인 가자의 상황은 매우 궁핍했다. 미국은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분류하고,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하마스 정권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보에 지원을 중단하는 결단을 내린다. (285쪽)

 

가자와 ‘땅굴경제’

가자와 이집트 사이에는 1000개가 넘는 땅굴이 있다고 한다. 지하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약 6,000명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도 몇 군데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 땅굴 내 낙상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286쪽)

 

이집트와의 국경도 봉쇄했기 때문에, 땅굴을 통해 무역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PLO 의장이었던 아라파트 사후,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로 나누어지고 특히 가자 지구는 실질적으로 하마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면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실은 가자 지구 주민들이 직접 하마스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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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은 책이다. 그러나 이런 책은 소수의 관심만 끌고 절판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공공도서관이 잘 되어 있어 내가 읽을 수 있었다.

 종종 일본인 학자가 쓴 책들 중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역사적인 다양한 사실들까지 언급하며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참고문헌을 보니, 일본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만큼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는 뜻일 게다. 반대로 일본의 문제는 그런 전문 연구자들, 인문학자들의 성과나 의견, 발언 등이 일본의 정치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 오해하기도 한다.

 

이 책은 절판되었으므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를 바란다. 강력 추천한다.  

 

우스키 아키라 臼杵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