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칼의 노래, 김훈

지하련 2001. 12. 3. 09:17

칼의 노래 - 10점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김훈(지음),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내 몸 속에, 내 가슴 속에 죽여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소설의 짧고 단단한 문장들 틈 속에서 소리죽여 울어야만했다. 하지만 죽여야할 것들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 몸 속, 내 가슴 속에서 날 공격했고, 소설 속 화자인 이순신이 죽여간 왜며, 부하며, 조선포로며, 전과를 말해주기 위해 짤려져, 소금에 절여진 머리통 위로 내 얼굴이 떠올랐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로 젖는구나

젊은 왜가 칼에 새겨놓은 저 글귀는 이내 내 영혼을 파고들고, 나를 버려도 내 육체를 버리지못함이 한없이 슬프고 내 몸짓들의 까닭없는 부정들이 날 공포 속으로 밀어붙인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짧게 소설가 김 훈에 대해서 생각했고 조금 길게 이순신에 대해 생각했고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피로 물드는 전쟁과 인생의 무의미함과 사랑, 그 아득한 적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답이란 없었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말이 길어지면 요점이 흘려지고 인생은 미궁 속으로 빠져 헤매이게 된다. 그러니 말은 짧고 수사는 최대한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면 요점은 분명해지고 인생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요점은 무엇이며 제 갈 길을 가는 인생이란 과연 무얼까.

이 소설 속의 이순신의 독백 사이로 김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만 쳐다보고 가는 문장들. 그래서 베어지고 억제되고 간결해지면서 스무살 처녀의 몸매처럼 아름답지만 까닭 없이 슬퍼지는 건, 왜 앞으로 가는가에 대해 이순신도 모르고 김훈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면서 울었다. 내 가슴 속 죽여야할 적들을 죽이지 못함을, 이 소설은 함께 울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