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쓸쓸한 아픔

지하련 2024. 7. 26. 17:29

 

 

팔짱을 끼고 베갯머리에 앉아 있자니 천장을 보고 누운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죽을 거예요.
여자는 긴 머리채를 베개 위에 풀어두고, 그 속에 부드러운
윤곽의 오이씨 같은 얼굴을 가로누인다. 새하얀 빰에 
따뜻한 혈색이 알맞게 비치고 입술 빛깔은 역시나 붉다.
도저히 죽을 사람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죽을 거예요, 분명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죽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벌써 죽는 거야?
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어보았다. 죽고 말고요.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랗고 물기 어린 눈이었다. 긴 속눈썹에
에워싸인 곳은 온통 검었다. 그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다.
- 나쓰메 소세키, <열흘 밤의 꿈 - 첫 번째 꿈> (<<소나티네>>, 김석희 옮김, 이소노미아)중에서 

 

 

나를 귀찮게 하던 오른편 아래 어금니를 뺐다. 며칠 전부턴 한 귀 쪽가 멍.멍하다. 계속 멍멍한 게 아니라 멍.멍거린다는 표현이 정확할 듯 싶다. 이명인가. 삼개월 다닌 팀 멤버가 그만 두었다. 거의 신입 직원인데, 적절한 경력자 뽑기 어려워 신입을 뽑아 훈련을 시켜 성장시키는 편이 낫겠다 싶어 채용했는데, 힘들었나 보다.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도 마음이 착찹해졌다. 최근엔 술자리가 많았다. 책을 읽었지만, 음악은 뜸하게 들었다. 귀가 계속 멍.멍.거리다 보니, 이게 얼굴의 한 쪽 부분에 끊임없이 긴장감을 선사하던, 흔들리는 어금니 때문인가 싶어 오늘 뺐다. 젊고 상냥한 남자 의사선생님은 아래니를 뺐으니, 뺀 이와 맞닿는 윗니는 아래로 계속 처질 거예요. 그러니, 고정시키기 위해서 철사를 붙여놓을 겁니다. 나는 알아서 하시겠지 생각하고 네 라고 했다. 몇 시간 동안 입 안에 물고 있던 솜을 뱉고 난 다음 혀로 조심스럽게 윗니에 붙은 작은 철사에 대어보니, 바로 붙인 것이 아니라 고정하기 위해 철근 골조 구조처럼 느껴졌다. 아픈 이를 뺀 자리는 한 동안 비워둘 것이다. 이제 이가 몇 개가 남은 걸까. 작년에 하나를 빼고, 올해 하나를 뺐으니. 그리고 내년에 하나를 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 몸에서 하나하나 사라져 비어져가는 구석이 생길 것이다. 내 몸에서 생기는 빈 구석만큼 내 마음도 비워져 갈까. 

 

죽을 거예요라고 답하던 그녀는, 그래도 죽는걸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하다가 죽는다. 죽기 전,

 

"죽으면, 묻어주세요. 커다란 진주조개로 구멍을 파서,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 조각을 묘비로 세워주세요.
그런 다음 무덤 옆에서 기다려주세요. 다시 만나러 올 테니까."
- 나쓰메 소세키, <열흘 밤의 꿈 - 첫 번째 꿈> (<<소나티네>>, 김석희 옮김, 이소노미아)중에서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백 년을 기다린다. 나도 저렇게 기다린 적이 있을까. 기다리기엔 언제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 확신이 생길 때엔 그녀가 기다리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읽으며 한껏 세상에 무심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죽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오이씨같은 얼굴의 그녀가 검은 눈동자로 날 쳐다보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에, 어두워진 금요일 밤이 되면, 혼술이나 할까 했는데, 이 뺀 자리는 아프고 귀는 멍.멍.거리니, 가능할 지 모르겠구나. 나쓰메 소세키나 소리내어 읽어야겠다.

 

"백년 만 기다려 주세요."
"백 년만, 내 무덤 옆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꼭 만나러 올 거니까."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검은 눈동자
안에 또렷하게 비치던 내 모습이 흐릿하게 흐트러졌다.
잔잔한 수면이 흔들려 물 위에 비친 그림자를 흐트러뜨리듯
밀어내는가 싶더니 여자가 맑은 눈을 굳게 닫았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흘러 뺨에 맺혔다. ... ....
이미 죽은 것이다. 
- 나쓰메 소세키, <열흘 밤의 꿈 - 첫 번째 꿈> (<<소나티네>>, 김석희 옮김, 이소노미아)중에서 

 

 

드디어 비가 그쳤다.